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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孝)가 나라를 살린다.

취송(翠松) 2007. 6. 23. 15:38
 효(孝)가 나라를 살린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아니 발해가 멸망하고 난 후 우리나라는 한반도의 좁은 땅덩어리에서 벗어나 보지를 못했다. 그렇다고 외진 반도에서 조용하고 아늑하게 우리끼리의 삶만을 구사할 수 있었느냐하면 그렇지도 못했다.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거란의 침입, 여진족의 침입, 끝내 몽고의 침입에는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몽고의 지배는 길었다. 고려 역사는 475년이다. 그중 몽고의 1차 침입이 1231년에 있었고 몽고를 고려 땅에서 몰아낸 것이 공민왕 때의 일이니 100년 이란 세월을 몽고에 시달리며 살았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으로 온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바로 이은 청나라가 침입한 병자호란에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는 비운의 임금이 되고 말았다.

서희 장군이나 강감찬 장군 그리고 이순신 장군처럼 유능한 장군에 의해 보기 좋게 적을 물리친 경우도 있으나 천민이나 평민인 일반 백성들의 항거에 의해 적을 몰아낸 경우도 적지 않다. 과연 천민이나 평민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려고 싸운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애국심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 까. 나는 이들이 바로 조상의 묘를 지키기 위해서, 아랫목에 누워있는 아프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내 부모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전쟁터에 나간 내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삽이나 낫을 들고 나선 부모들, 바로 이런 힘이 끝내 나라를 지켜낸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요사이 효가 무너지고 있다. 부모를 죽이는 자식의 사건이 너무 빈번하게 일어난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사건을 보고도 사람 사는 곳엔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반 유형의 범죄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부모 묘에 여막을 짓고 3년 시묘를 끝낸 사람이 있어 화제가 되었다. 물론 현실적이지 않다. 3년 여묘가 효라면 전부 불효자를 만드는 것이다. 현대의 산업사회에선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런 효를 강조하는 시대는 벌써 끝이 났다. 헌데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는 적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원초적 효를 시행했다는 중요성보다 더 값진 것은 효의 불이 아직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현대인에게 효의 가르침을 준 상징적 의미는 크다 할 것이다.

누가 말했다. 우리 세대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마지막 세대요, 자식에게 버림받는 첫 세대라고 말이다. 정말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인가.

이제 효는 부모 자식간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문제요, 국가의 문제이다. 3년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가정에서 돌볼 수 없는 중증 노인 환자들, 가난에 시달리는 가정에서 얹혀살아야 하는 노인네, 이런 노인들이 존재하는 시대에서 효를 강조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효가 나라를 지킨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그것이 나라에서 노인을 책임져야 하는 이유이다.

가정이 바로서야 사회가 바로서고 사회가 바로서야 나라가 산다. 지금은 너무 급격하게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사회가 바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조건 변화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만이 올바르고 진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옛 것을 지키며 앞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진보요, 개혁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