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송(翠松) 2015. 12. 1. 09:50

굴비/오탁번(1943~)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가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이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