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성 시 모음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 정희성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겠느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시인 본색
누가 듣기 좋은 말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가을의 시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얼마나 황홀한가
황홀 속에 맞는 가을은
잔고가 빈 통장처럼
또한 얼마나 쓸쓸한가
평생 달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네
가여운 내 사람아
이 황홀과 쓸쓸함 속에
그대와 나는 얼마나 오래
세상에 머물 수 있을까
숲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아메리카 원주민들 아라파흐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
쇠를 치면서
쇠를 친다
이 망치로 못을 치고 바위를 치고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실한 팔뚝 하나로 땀투성이 온몸으로
이 세상 아리고 쓰린 담금질 받으며
우그러진 쇠를 치던 용칠이
망치 하나 손에 들면 신이 나서
문고리 돌쩌귀 연탄집게 칼 낫
온갖 잡것 다 만들던 요술
고향서 올라온 봉제 공장 분이년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다던 용칠이
어서 돈벌어 결혼하겠다던 용칠이
밀린 월급 달라고 주인 멱살 잡고
울분 터뜨려 제 손 찍던 용칠이
펄펄 끓는 쇳물에 팔을 먹힌 용칠이
송두리째 먹히고 떠나 버린 용칠이
용칠이 생각을 하며 쇠를 친다.
나혼자 대장간에 남아서
고향 멀리 두고 온 어머니를 생각하며
식모살이 떠났다는 누이를 생각하며
팔려 가던 소를 생각하며
추운 만주벌에서 죽었다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떡을 칠 놈의 세상, 골백번 생각해도
이 망치로 이 팔뚝으로 내려칠 것은
쇠가 아니라고 말 못 하는 바위가 아니라고
문고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저 산이 날더러 - 고통 받는 나에게 산이 말한다.
산이 날더러는
흙이나 파먹으라 한다
날더러는 삽이나 들라 하고
쑥굴헝에 박혀
쑥이 되라 한다
늘퍼진 날 산은
쑥국새 울고
저만치 홀로 서서 날더러는
쑥국새마냥 울라 하고
흙 파먹다 죽은 아비
굶주림에 지쳐
쑥굴헝에 나자빠진
에미처럼 울라 한다
산이 날더러
흙이나 파먹다 죽으라 한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드려다 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돌아다보면 문득
어두워져야 별을 볼 수 있다.
절망이 어둡다면 희망은 밝은 것?
그리하여 우리는 밤조차 환하게 켜 놓았다.
이제 별은 더 이상 하늘에 있지 않은 것이냐?
어두운 것들을 찾아
오롯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이 여기 있었구나
그렇구나
빛 안에 어둠이 있었구나
돌아다보니 문득,
내가 걸어온 길이 그랬었구나
길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