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송(翠松) 2022. 3. 20. 09:00

열린하늘길

왕건 8길 중 두 번째 길은 열린하늘길이다. 열재에서 부남교까지 약 4.5 .

왕건 1길의 끝자락에서 만난 열재(十嶺)는 두 번째 길의 시작점이다. 길을 들어서기 전에 열재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안내판을 들여다본다. 이 고개는 신라 시대에 영천에서 능성재-미대동-열재-기성동-여릿재를 거쳐 군위로 이어지던 교통의 요충지로, 당시에는 열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큼 넓었기에 열재로 불렸다고 한다. 또한 옛날에는 산세가 험악하고 산적들이 많아 열 명 이상이 모여서 이 고개를 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42년 서촌 초등학교가 생기기 전에는 중대동 일대의 어린이들은 열재를 넘어 공산초등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한참을 지체했는데도 오가는 사람이 없다. 깊은 산 속에 홀로 있는 것 같다. 그 옛날에 많은 사람이 오르내렸다니 오히려 지금보다 마을이 더 컸던 모양이다. 열재를 지나 능선 길을 걷는다. 양쪽은 벼랑이고 걷는 길은 좁다. 높은 산을 등산이나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우거진 숲이 햇살을 가려주고 시원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씻어준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들의 소리가 청아하다. 바람에 나부껴 살랑거리는 잎새들의 소리가 귀를 맑게 씻어준다. 벗과 나는 깊은 산속에나 든 듯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고개를 넘어 조금 내려가자니 조그만 다리가 하나 나타난다. 하늘다리란 표지가 있다. 산 아래 자락 길에 있는 아담하고 조그만 다리를 하늘다리라고 하다니 피식 웃음이 난다. 하늘다리는 높은 곳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뒤돌아서서 건넌 다리를 다시 확인해 본다. 이번에는 마음이 달라진다. 외롭게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리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계곡이 비록 좁고 다리가 작다지만, 다리가 없었다면 어찌 건널 수 있었겠는가. 꼭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하늘 높이 연결이 되어야 하늘다리인가. 다리가 비록 작아도, 높은 곳에 있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찾지 않아도 하늘다리 역할을 충분히 하지 않는가. 낮은 곳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조그만 하늘다리를 보니 깊은 산속 홀로 핀 이름 없는 한 송이 야생화를 본 듯 가슴이 찌릿하다. 말없이 자리를 지키며 길손의 걸음을 도와주고 있으니 말이다.

하늘다리를 보며 내 삶의 행적을 더듬어 본다. 나는 언제 내 작은 몸을 누구를 위해 역할을 해본 적이 있는가. 늘 나의 능력 없음을 탓하기만 했을 뿐 내 조그만 능력이라도 찾아 남을 위해 힘써 본 적이 없었으니 참으로 민망하다. 깊은 산속에서 제 역할을 묵묵히 하는 하늘다리가 더욱더 고맙다.

발걸음이 더욱더 가벼워진다. 조금 걸으려니 임도인 듯한 넓은 포장도로가 나온다. 산속에서 만나는 넓은 길이 생뚱맞다. 길을 건너니 거저산으로 들어서는 길이 보인다. 한참을 걸었는데 다시 산을 올라야 하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거저산은 해발 520m로 별로 높지는 않은 산이다. 하지만 지금껏 걸었으니 산이 신경 쓰일 수밖에. 나는 잠시 인생길을 생각해 본다. 앞으로 나타날 새길을 감에 있어 지금껏 걸었던 길이 중요한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많이 지쳐있으면 쉬었다 가는 여유가 필요하고 힘이 비축되었다면 힘차게 달릴 수 있는 게 아니겠나.

이름이 거저산이니 거저먹듯 쉽게 올라가리라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산을 오르려니 숨이 헉헉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거저산의 이름을 검색해본다. 거저산이란 명칭이 정확한지는 불분명하단다. 용진마을 어른들은 그냥 '들미()'라 한다. 산줄기가 잠깐 들고 오르는 양상을 묘사한''과 산의 우리말인 ''가 붙어 만들어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들뫼'의 현지 발음인 '들미''들밑'(밑을 들어 올리다)으로 해석해 거저산(擧底山)이라는 어려운 한자 이름으로 만들어졌을 개연성이 크다고 한다. 우리말을 억지로 한자어화 한 우리네 양반들이 만들어낸 이름이 아닌가 싶다.

정상에 오르니 하늘에 오른 듯 청량함이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은 어디에서나 상쾌하다. 정상이지만 우거진 수목이 마치 계곡이라도 들어선 듯 시야를 가린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산야가 헐벗어 민둥산이 많았는데 요즈음은 어느 산을 가도 수목이 우거져 푸르다.

거저산 정상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하산 길에 들어선다. 양쪽으로 벼랑인 능선 길을 걷는다. 청아한 새소리가 바람결에 스며든다. 가슴조차 시원하게 씻겨 내리는 기분을 만끽하며 조금 걷자니 하늘마루다. 청명한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여유롭고 바람이 살포시 목덜미를 감싸 안으니 이래서 하늘마루가 아닌가 싶다.

하늘마루를 지나니 급하지 않은 내리막길이다. 높은 곳을 오르느라 힘이 들었기 때문일까, 숲 우거진 길을 지나 내려가려니 마음조차 정화되는 듯 시원해진다. 열린 하늘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열린하늘길답게 주변의 숲과 나무가 심신을 상쾌하게 씻어준다. 내려가는 길이라 힘들지 않게 내려왔다.

왕건 2길이 끝나는 부남교가 보인다. 하지만 부남교는 다시 왕건 3길의 시작이다. 그렇게 끝과 시작이 이어지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열린하늘길은 구름 위로 시원하게 뻗은 무지개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현재 내가 걷는 길이요, 내가 추구하는 희망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