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송(翠松) 2022. 3. 21. 09:39

묵연체험길

왕건 8길 중 세 번째 길은 묵연체험길이다. 부남교에서 물넘재까지 약 5.4 .

묵연의 사전적 의미는 입을 다문 채 말없이 조용히 하는 것이다. 부남교를 건너니 조용한 시골 동네가 나타난다. 용수동 상중심 마을이다. 산속 마을은 그 삶 자체가 묵연이 아니겠나. 조용한 마을을 지나자니 내 마음도 절로 진중해지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풍스러운 옛집이 보인다. 달성 서씨 재실인 중심재다. 그 옆으로 육각정의 정자가 있다. 묵연 센터다. 몸도 쉴 겸 잠시 마루에 앉는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깊게 들숨 날숨 하며 묵연을 체험해본다. 묵연은 몸이 아닌 마음으로 하는 것, 갈 길 바쁜 사람에게 어디 묵연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던가. 다시 일어나 바쁘게 갈 길을 재촉한다.

묵연 센터를 지나 소나무 숲길로 들어서니 묵연이란 글자를 새겨놓은 조그만 바위가 길을 안내한다. 묵연 길로 들어서니 우람한 소나무들이 군락으로 숲을 이루었다. 청아한 솔바람이 가슴으로 스며든다. 피톤치드가 쏟아져 나와 가슴과 머리를 시원하게 씻어주는 듯하다. 무슨 묵연의 의지가 필요하겠나. 절로 묵연이 되는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묵연 길은 달성 서 씨 구계 서침의 재실 중심재에서 수행하던 박정석 거사가 2년 반에 걸쳐 삽과 곡괭이로 손수 만든 행선(行禪)이라 한다. 말을 줄이고 솔바람 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걸으며 묵연 체험을 해보란다. 묵연은 조용히 입만 다물고 걷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을 진중히 하는 명상의 개념이 아닐까 싶다. 명상이 무상무념의 상태에 드는 것이라면 이는 묵연의 또 다른 말일 것이다. 거사는 무엇이 그리 절실하여 2년 반이란 긴 세월 동안 묵연의 길을 만들었을까.

묵연체험길을 벗어나 산길을 오른다. 올레길이라지만 산길은 산길이다. 올라가는데 숨이 헉헉 차오른다. 얼마나 올랐을까, 세 갈래 길이다. 잠시 앉아 숨을 돌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얼마를 걷다 보니 되돌아 나오는 길이다. 단순한 길인데 혼란스럽다. 산세 좋은 소나무 숲이니 왔다 갔다 하며 조금 더 묵연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길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걷다 보니 조금 전에 쉬었던 곳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빠졌는데 쓸데없이 헛길을 걸었다는 생각에 가슴에 화가 차오른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묵연 체험의 길에서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며 자아 성찰을 하라는 의미로 해석해본다. 단지 말없이 조용히 하는 게 묵연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묵연 길을 벗어났나 보다. 길을 따라 8부 능선에 오르니 통시바위라는 안내 표지가 있다. 통시는 변소라는 의미의 경상도 방언이다. 두 바위가 나란히 있다. 정말 길 가던 나그네들이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던 곳처럼 말이다.

내가 어렸을 적 화장실도 이랬다. 양쪽으로 놓여있는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았다. 앞에는 아궁이에서 퍼다 놓은 재가 잔뜩 있고 볼일을 본 후에는 나무 삽 같은 것으로 재를 덮어서 변을 뒤로 넘겼다. 그것은 밭에 거름으로 쓰였다. 농촌의 화장실은 넓었고 그곳은 거름 생산 처였다. 농사를 많이 짓는 집에만 화장실이 있고 동네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며 거름 보시를 했다. 통시 바위 아래에 인분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볼일 본 사람은 없나 보다. 바위는 그냥 조망처일 뿐이다. 바위에 올라서서 뒤돌아보니 저 멀리 거저산 정상이 보인다.

통시 바위를 뒤로하고 능선 길을 따라 조금 더 걷자니 특이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 발바닥 바위란다. 장군의 발바닥인가, 커다란 바위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난다. 자연에 인위적인 이름을 붙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이곳저곳 자연을 바라보며 함께 호흡해 보는 여유를 가져보라는 의미가 아니랴.

산 위에는 여기저기 바위가 많다. 그런데 집채만 한 바위 모서리가 전부 깎이어 둥글둥글하다. 계곡에서 구른 돌도 아닌데 얼마나 긴 세월 동안 풍화에 단련되었으면 이리 둥글게 되었으랴.

나는 한때 명상 수련원을 운영했었다. 손님 한 분이 오셨다. 친구에게 큰 액수의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해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고 했다. 지금껏 억지로 참고 또 참았지만 끝내 화가 치밀어 병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명상수련으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다. 며칠 수련을 하더니 도저히 더는 수련을 못 하겠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간신히 잊어가는 기억이 되살아나 가슴에 불이 나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수련을 못 하겠다고 했다.

그렇다. 그분의 아픈 기억이 머리에서 지워진 게 아니고 잠시 보자기로 덮어 놓은 듯 가려졌을 뿐이었다. 수련은 오히려 모난 바위가 덮어놓은 보자기를 찢고 밖으로 나와 버리게 했다. 수련은 모난 바위를 풍화가 갈아내듯, 헝클어진 가슴을 잘 다듬어야 하는 작업이다. 모난 곳을 갈아내는 단련을 어찌 쉽게 할 수 있을까. 산 위의 바위는 모난 각을 둥글게 하기 위해 억겁의 세월을 풍화에 몸을 맡겼었는데 말이다. 사람이 가슴에 박힌 모서리를 깎아내기 위해서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미약한 내가 어찌 사람 가슴에 박힌 모서리를 다듬어줄 수 있을까.

오늘 묵연 길을 걸으며 가슴 속의 응어리 지우는 법을 생각해 본다. 이 작은 몸뚱이 하나 길들이지 못하는 내가 참으로 왜소해 보인다. 꿋꿋하게 서있는 소나무 숲을 따라 내려가니 물넘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