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송(翠松) 2022. 3. 27. 09:12

호연지기길

왕건 8길 중 여섯 번째 길은 호연지기길이다. 평광동 버스 종점에서 매여동 버스 종점까지 약 5.

평광 버스 종점에서 호연지기길로 향한다. 이 길은 또한 첨백당(瞻栢堂)으로 가는 길이다. 첨백당은 호연지기길로 들어서는 곳의 이정표를 지나 조금 걸으면 나타나는 아담한 고택이다. 첨백당은 우효중의 효행과 우명식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단양 우씨 재실이다. 1896년에 지어진 충효의 상징적 건물로 지금은 대구광역시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첨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명식 선생의 묘소가 있는 잣밭골(栢田谷)을 우러러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 단양인 우씨가 뿌리를 내리고 대대로 살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우익신이 경기도 여주에서 난을 피해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그의 12세손인 우효중이 자기 어른의 병환이 위독하여지자 손가락을 절단하여 그 피로 회생케 하는 효행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부모 돌아가신 뒤로도 3년간 시묘 살이를 하여 효의 집안임을 널리 알려지게 했다. 첨백당은 높은 벼슬이 증직되었는데 거절하고 시묘를 한 우효중과 한 말 국운의 쇠퇴함을 슬퍼하며 벼슬을 버리고 숨어 산 우명식의 절개를 기리고 아울러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지어졌다.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효와 충은 절대적 가치였다. 공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효는 덕의 근본이요, 모든 가르침이 효에서 나온다고 말이다. 효의 가르침이 절실한 요즈음 첨백당이 가르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나는 첨백당 앞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과거를 더듬어 본다. 나는 직장을 따라 홀로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다. 전화도 없는 집에서 셋방살이를 했기에 부모가 계신 고향 집에는 연락조차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친구가 우리 집 소식을 가지고 왔다. 아버님이 위독하다는 전갈이었다. 부랴부랴 열차를 타고 갔을 때는 이미 아버님은 나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위중한 상태였다. 병원에서는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고 강제 퇴원을 시켰기에 집에서는 식구들이 둘러앉아 운명의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냥 식구들과 함께 촛불처럼 꺼져가는 목숨을 애타게 바라볼 뿐이었다. 과연 나는 그때 단지하여 아버님 입속으로 피 한 방울 떨어뜨릴 효심은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가슴만 아리다. 또 내 자식들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마음이 어떨지 생각도 해본다.

첨백당 바깥마당에는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단아한 자태로 서 있다. 커다란 돌비석에 새겨진 안내를 보니 광복 소나무라 한다.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1945815일 단양 우씨 첨백당 문중의 다섯 청년이 광복을 기념코자 인근 백발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뽑아 첨백당 앞에 옮겨 심은 것이라 한다. 천년만년 자라 첨백당의 자랑이요, 온 국민의 자랑스러운 나무가 되기를 빌어본다. 효와 애국의 기운이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첨백당 앞에 서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

왕건길을 걷기 위해 산길로 들어선다. 첨백당의 기운을 흠뻑 받았기 때문일까, 산길을 걷는 발걸음에 힘이 실린다. 산길에도 키 큰 소나무들이 햇볕을 막아준다. 솔잎 사이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땀방울을 씻어준다. 한참을 걷다 보니 삼거리에 이정표가 있다. 거기에는 대암봉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다. 갔다가 되돌아와야 하는 곳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잠시 들려보기로 했다.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갈까 말까 망설이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기어이 다 갔다. 드디어 대암봉이다. 해발 465의 사방이 확 트인 제법 높은 봉이다. 대암봉의 이름은 이곳 옻골 마을에 거주한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학자인 대암(大巖) 최동집의 호에서 따온 것인지 아니면 산에 큰 바위가 있어 붙인 이름인지는 모르겠다. 대암봉 가는 길에는 절벽을 이룬 큰 바위가 있기는 하다.

되돌아와서 다시 가는 길을 재촉하여 옻골봉을 오른다. 옻골봉 아래에는 예부터 옻으로 유명했다는 옻골 마을이 있다. 여기까지도 힘들게 올랐는데 요령봉은 더 높게 보인다. 그러니 어찌하겠나, 가야 하는 길인 것을. 해발 492의 요령봉 위에 올라선다. 정상에는 데크로 공간을 만들어 여러 사람이 같이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지금은 벗과 단둘이다. 하늘은 푸르고 우주에 충만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산봉우리에서 세상을 일망(一望)하니 이게 바로 호연지기가 아니겠는가. 슬그머니 눈을 감아본다. 호연지기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런데 어디 대자연을 호흡하는 것만이 호연지기이겠는가. 산을 오르기 전에 들렸던 첨백당에서 향기처럼 흐르던 기운이 산 위로 뻗쳐오르는 듯하다.

호연지기란 맹자의 공손추 상편에 나오는 말로, 사람의 마음에 차 있는 너르고 크고 올바른 기운을 말한다. 공손추가 맹자에게 호연지기가 무엇이냐고 묻자 말로 하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말했다. 호연지기란 그 기() 됨이 다시없이 크고 다시없이 강하여 곧게 기르는 데 해()하는 것이 없으면, 곧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 그 기는 언제나 의()와 도()에 짝하여 함께하니 이것이 없으면 허탈이 오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의와 도를 잃으면 기는 위축되어 호연에 이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호연지기는 대자연을 호흡하는 것만이 아니라 의와 도를 짝하여 실행하는 우리네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의를 공자는 어진 것이라 했고, 맹자는 옳은 것이라 했다.

산야에 싱그러운 기운이 넘친다. 첨백당에서 향기처럼 뿜어져 나온 호연지기가 자연의 산 위로 훠이훠이 날아오른다. 호연지기를 받아서일까,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