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길 탐방 후기
왕건길 탐방 후기
특집으로 왕건길을 실었다. 왕건길은 대구 북쪽에 위치한 팔공산 주위를 걷는 여덟 개 구간의 올레길이다. 이곳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역사가 있다. 신라의 요청을 받고 도우러 왔던 고려 태조 왕건은 오히려 팔공산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포위당한다. 동수전투에서 대패한 고려군은 파군하게 된다. 왕건은 신숭겸의 위왕대사(爲王代死)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구사일생 탈주에 성공한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 가득한 울창한 숲속을 거닐며 우리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맛이 즐거웠다. 그 전에 올레길 중 몇 곳은 가본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번에 첫길부터 순차적으로 걸으며 탐방해 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놓고 맞추어 다닌 것은 아니다. 그냥 시간 나는 대로 한 구간도 걷고 두 구간도 걸었다. 혼자 다니기는 무리인 듯싶어 산을 좋아하는 벗에게 동행을 청했고 벗이 기꺼이 응해주었다.
첫걸음을 뗀 날은 바람 싱그러운 유월 중순의 초여름이었다. 차츰 뙤약볕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에 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걷기도 했다. 평광에서 홍로 사과를 수확하는 것을 본 때는 구월 초순인데도 더위는 여전했다. 하지만 사과나무의 붉은 열매가 가을을 부르는 듯 상량한 기운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올레길이라 가볍게 사색하며 걷는 길 정도로 생각했는데 높은 산이 많았다. 팔공산 정상에 비길 만한 산들은 아니었지만 만만하게 오를 수 있는 곳도 아니어서 많은 땀을 흘려야 했다. 나는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당시를 생각해 보았다. 전투에 대패한 후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면서 숨어 도망가는 왕건의 신세가 어떠했을까.
며칠을 거쳐 탐방을 완료했다. 요즈음은 어느 산엘 가나 나무가 무성하게 많다. 무더운 여름에도 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좋았다. 이명처럼 들리는 각종 벌레의 울음소리도, 징징대는 매미의 울음소리도 적막 같은 산속의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어떤 때는 왕건이 고생했던 길을 답습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내가 산을 즐기는 것인지 착각할 정도였다. 걷기 힘든 길도 있었지만, 사색하며 즐기는 길도 있었다.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길을 탐방하였다는 자부심에 가슴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