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강//김희자(2009 제1회 목포문학상 수상작)
머문 듯 유유히 흐르는 강 하류에 해가 저문다. 하늘의 빛을 따라 강물의 빛도 변한다. 쪽 푼 하늘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여 붉은빛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강나루에 푸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한순간도 멈출 수 없이 흘러온 강물은 하늘빛을 말없이 받아들인다. 강도 하루도 저무는 순간이 아쉬웠던 탓일까. 강물이 잠시간 질곡의 세월 속에 살아온 어머니의 한 서린 삶처럼 붉은 빛으로 요동을 치더니 다시 잠잠해진다.
먼 길을 흘러왔던 만큼 흔들림 없이 중심을 두고 밀려가는 물길이 어머니의 삶과 흡사하다. 저무는 강에 지리산이 내려와 안기고 하루해가 강물 속으로 잠긴다. 신선하고 비릿한 강물에서 어머니의 젖 냄새가 배어난다. 흐르면서 맑아지고 물기가 있어 비로소 생명이 사는 강. 삶의 시작은 물이며 어머니의 품이 아니런가. 조용히 흐르는 물살이 세상사에 찌든 우리 삶을 어루만져 준다. 강가에 선 버드나무 가지가 물속으로 들어가 강물을 저으며 홀로 깊어지는 마음에 풍경 소리를 낸다. 저무는 강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걸 눈뜨게 되는 순간 저무는 어머니의 생이 강물에 아슴아슴 일렁인다.
섬진강 하류는 어머니를 닮았다. 피 어린 민족의 아픈 상처를 씻기라도 하듯 철철 흐른 피아골 물과 지리산의 넉넉한 산그늘을 품고 모든 생명이 시작된 바다로 몸을 섞으러 가는 길목이다. 하류로 갈수록 강은 넓어지고 강물의 속도도 부드러워진다. 지리산과 무등산 골짜기에서부터 한 갈래로 시작된 물길이 여러 갈래의 물길과 한 몸이 되어 깊은 심연을 이루며 흘러온 강물이다. 굽이치고 꺾이며 돌고 돌아 흘러온 하류의 강은 깊고 넓은 강물을 끌어안고 머무는 듯 흐르며 바다로 간다. 그 장엄한 침묵은 우리네 삶도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걸 일러 준다. 젊은 날의 출렁임을 가라앉히고 인고의 세월을 다독이며 살아온 어머니처럼 상류에서부터 자분자분 흘러온 강물이다. 강물 위로 그려지는 길이 강 너머 마을에 등불을 켜듯 내 마음에도 작은 등불을 켠다.
이 강이 흐르고 흘러 바다와 만나는 곳이 고향 남해이다. 강물처럼 흘러간 희미해진 유년의 기억을 거슬러 더듬는다. 맏며느리인 어머니는 집안에 혼사가 있을 적에는 옷감을 끊으러 큰 장이 열리는 화개장터로 나갔다. 먼 장터에 다녀와서 푼 보에는 젊은 날의 어머니 가슴을 닮은 다홍빛 옷감과 강물을 닮은 쪽빛 옷감이 물결처럼 접어져 있었다. 저무는 강에 화개장터를 오고 갔던 어머니의 모습이 물결친다.
어머니는 열일곱 살에 가마를 타고 무지개재를 넘어 다랭이마을로 시집을 왔다. 외동딸로 곱게 자랐던 어머니는 한 살이 더 많은 아버지와 결혼을 해 맏며느리가 되었다. 꼬장꼬장한 시어머니와 층층 아래로 시동생이 줄줄이 있어 옷고름에는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고 했다. 그에 더해 마흔다섯 살까지 자식을 낳아 셋을 먼저 가슴에 묻었으니 어머니의 애달픈 심곡을 생각만 해도 짐작이 간다.
아버지는 젊은 날 한때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해 술독을 끌어안고 살았다. 술만 입에 들어가면 아버지의 자리를 망각했다. 그런 탓에 가장의 역할까지 대신해야 했던 어머니는 강인하고 억척스러웠다. 아버지가 손을 놓은 일철을 놓치지 않으려고 남자의 일을 서슴거리지 않고 하셨다. 머리에 수건을 질끈 두르고 남정네처럼 소를 앞세우고는 쟁기질을 하셨다. 그 뒤를 따르며 고사리 손으로 일손을 돕던 피붙이들에게 어머니의 강한 생활력이 배어들었다. 굴곡진 삶을 끝내 다스리지 못한 어머니는 뇌경색으로 두 번이나 쓰러졌지만 꿋꿋하게 다시 일어나 팔순을 코앞에 두고 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나 또한 세월의 강을 말없이 뒤따르고 있다.
황혼이 깃들고 땅거미가 스미는 솔숲에 젖은 강바람이 불고 어둠이 눕는 강 위로 산 그림자가 따라 눕는다. 자연과 사람을 살리며 생명의 젖줄이 되는 강. 의연한 깊이를 보여 주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빈 가슴에 행여 남아 있을 온기마저 훌훌 털어낸다. 상류에서부터 산과 들을 지나고 바위와 돌 틈을 어렵사리 흘러온 어머니의 강물처럼 나 또한 삶을 끌어안고 지금까지 흘러왔다. 삶이란 끊임없는 순환과 반복이다. 흐르는 것이 어디 물뿐이던가. 우리네 삶도 흐르는 물과 같아서 밤낮 쉼없이 흐른다. 저렇게 강이 흐르듯 세월이 흐른다. 세월이 흐름으로써 저마다 갖고 있는 상처나 슬픔들이 치유되고 아물어진다.
흐르면서 맑아지고 강해지는 것이 강물이다. 물은 어머니처럼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단단한 것을 이긴다. 또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근원이며 흐르면서 맑아지기 때문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만물을 활성화시킨다. 모든 생명은 소금물인 바다에서 시작되었고 그 생명이 땅에 이르러 삶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자궁이 양수로 차면 태아가 그곳에서 자라듯이 물기가 있어 모든 것이 생생해진다. 저무는 강이 모든 생명이 시작된 바다로 흘러가듯 내 어머니 역시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 강물처럼 한 생의 바다에 당도하고 있다.
강 건너 마을에 하나 둘씩 등불이 켜진다. 가는 물줄기로 시작된 강이 하류까지 먼 길을 흘러오듯 삶을 다독이며 먼 인생길을 걸어오신 어머니이다. 나도 이제 마흔 줄의 중간에서 어머니의 강물처럼 흘러간다. 샛강에서부터 모여든 강물이 하류에 이르러 이렇게 넉넉하듯, 고통의 길을 이겨내며 흔들림 없이 내 삶을 다독이며 어머니의 뒤를 따르고 싶다. 내 인생의 가을도 수많은 낯선 만남과 한 몸으로 녹아들어 한 생의 바다에 당도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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