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수필모음 82

울지 않는 반딧불이

울지 않는 반딧불이 / 박일천(16회 평사리문학상 대상) 시골집 대문 안에 들어서자 텃밭에서 푸성귀를 솎아내던 시어머니께서 흙 묻은 손을 털고 일어서며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신다. 가끔 다녀가는 자식들이 적적함을 밀어내는 말동무이리라. 이것저것 물어보며 세상 밖 이야기에 귀 기울이신다. 밭에서 솎은 어린 배추로 얼갈이김치를 담고 챙겨간 찬거리로 저녁밥을 지어 먹었다. 귀뚜라미 소리에 이끌려 그이와 함께 개울가로 나갔다. 동구 밖을 지나 갈대가 사운거리는 둑길을 따라 걸었다. 동산 너머로 열나흘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벼들이 그득 찬 들녘은 달빛에 젖어 희붐하다. 내 키보다 큰 갈대들은 냇둑 위에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있다. 갈대밭 언저리로 작은 불빛 하나가 깜박거리다 사라진다. 잘못 보았을까. 내 눈..

구두

구두/ 조일희-2017년 토지문학 대상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거리 중국집주차장에 웬 사내가 군드러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으로 받친 채 자고 있는 사내 옆으로 반쯤 남은 소주병이 파수꾼처럼 서있다. 아니꼬운 사내를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며 지나간다. 무심히 지나치려는 나를 사내의 알근한 구두 한 짝이 빤히 쳐다보며 아는 체를 한다. ​ 어린 시절, 추운 겨울에도 양말을 신을 수 없을 만큼 가난했었다. 애옥한 형편에 새 신발이라야 고작 일 년에 한두 번, 명절빔으로 받은 검정 고무신이나 운동화가 전부였다. 강산이 두 번씩 바뀌어도 우리 집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흐르는 시간은 촌스러운 나를 싸구려 구두를 신어도 아름다운 나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가 내민 화려한 구두..

무싯날

무싯날/이정화 - 2018년 평사리문학대전 수필 부문 대상 아무날도 아닌 날이 아니었다. 휑하던 장터에 다섯 손가락을 꼽으면 전이 펼쳐진다. 그날이 오면 돈이 돌고, 곡식도 돌고, 인심도 돌아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제사장 보러 진고개를 넘어 온 할배의 쌈짓돈과 이른 새벽 황장재를 넘어 온 자반고등어는 주인을 바꾼다. 장터에 해가 떠오른다. 높다란 장대에 노란 고무줄, 흰 고무줄, 검정고무줄을 두툼하게 매달아 든 사내가 다가온다. 설핏 보면 사람 없이 긴 고무줄 장대가 저 혼자 움직이는 것 같다. 구경꾼이 겹겹이 둘러선 곳에는 원숭이가 곡예를 넘는다. 자발없는 원숭이가 웅크리고 앉은 여자아이 꽃핀을 낚아채자 아이는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친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지포라이터와 돌, 손전등과..

석류, 다시 붉다

석류, 다시 붉다 / 김영인(2020 토지문학상) 늙은 석류나무에 다시 몇 송이 꽃망울이 맺혔다. 정원에 죽은 듯 서 있던 몸이었다. 봄꽃들의 잔치가 끝나갈 무렵 석류나무는 태아처럼 불그스레한 이파리를 살짝 내밀었다. 오뉴월 햇살 담뿍 머금으며 파릇파릇 몸집을 불렸다. 서른 끝자락에 이 집에 들어왔다. 적막한 마당에는 묵은 나뭇가지며 잡풀과 낮은 나무들이 뒤엉켜있었다. 한쪽에는 석류나무만이 하늘로 가지를 뻗친 채 푸르렀다. 뒷짐 진 터줏대감처럼 석류나무는 신혼살림 차리듯 들떠 들어오는 우리를 환하게 맞았다. 뜰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석류나무 아래다. 책을 읽다가 눈이 침침해지면 그 그늘로 달려갔다. 뜨락의 꽃과 나비도 바라봤고, 담 안으로 날아든 한 마리 흰 비둘기도 지켜봤다. 구름이 그리는 흑백 그..

아귀

아귀/윤정인 (2021년, 제21회 평사리문학 대상) 찬바람이 어시장을 휘돌고 간다. 시리고 헛헛한 속을 데워줄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 장바구니를 들고 나온 참이다. 동태, 대구, 도루묵을 견주다 손질된 아귀가 눈에 들어왔다. 싱싱한 애와 곤, 간과 위 내장도 함께 좌판에 진열되어 있어 보기에도 풍성하다. 겨울이면 어촌에는 아귀가 지천으로 널린다. 한때 동해안 집집의 마당과 옥상에는 오징어가 많이 널렸다. 어느 날부터 오징어가 자취를 감추자 아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머리 떼어내고 내장을 발라내고 빨래처럼 줄에 널어 반 건조시킨다. 멀리서보면 깃발 같기도 한 것이 무슨 점령군처럼 기세등등하기도 하다. 예전에는 아무도 아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물고기 씨가 마른 요즘에야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다. 거..

겨울소리

겨울소리/문경희(제11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사방 바람의 우범지대다. 홀로로는 결코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부조리에 맞서듯 바람은 닿아지는 모든 것들을 다그쳐 소리를 만들어낸다. 소리를 앞세워 자신을 과시하고, 소리를 채찍 삼아 세상을 평정하려 든다. 뒷산 능선을 넘어오는 북풍 역시 을씨년스러운 소리부터 앞세운다. 수척해진 나무들의 등짝에 냉냉冷冷한 문신을 새기고 있는지, 바람의 손이 스칠 때마다 구성없는 비명이 쏟아진다. 바람의 소리인지, 소리의 바람인지, 오늘 따라 집 뒤 굴참나무 숲정이는 귀곡산장이 따로 없다. 얼음장 같은 바람이 헤살을 놓는 날엔 무조건 퇴각을 외쳐야 한다. 바람에 항거하는 방법이란 고작 문이란 문을 꽁꽁 닫아걸고 보일러의 온도를 높이는 것뿐이다. 그러나 철옹성 같은 문도 소리의 ..

러시아워

러시아워/김희정(2021 제11회 천강문학상 대상) 작은 것이라도 매듭이 생긴 부분은 바늘귀에 걸린다. 풀어내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 바늘이 담쟁이 이파리 윤곽선을 바삐 들락거린다. 왕복 주행 하던 실이 덜컥 멈춘다. 교통이 원활하다 싶었는데 어느 지점부터 실이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교차로의 교통 체증이다. 바늘이 작은데다 땀이 너무 촘촘했는지 좌회전하려던 실과 우회전하려던 실이 만나 엉켰다. 접촉 사고다. 결국 멀쩡한 앞 실까지 잘라 내고 바늘귀에 새 실을 넣는다. 감정에도 때로 풀리지 않는 미세한 엉킴이 생길 때가 있다. 좁은 면에 실을 채우는 데도 변수가 생겨 시비가 엇갈리니 몇 번 끊어진 실을 이어 바꾸고 바느질을 한다. 빨강색만 눈에 띄던 날들이 있었다. 빨강색을 보면 설레고 흥분되었..

슬픔의 무게

슬픔의 무게/ 김영미(제10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여보, 소가 울어요." 남편은 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운다고요?" 내가 재차 묻자 들려던 숟가락을 힘없이 내려놓는다. 삼십여 년 소를 키우며 별일을 다 겪어봤지만 기둥과 문을 잇는 경첩 사이에 발이 끼기는 처음이다. 발목이 끼인 소가 고통에 몸부림치자 다른 소들이 술렁이더니 날뛴다. 소는 순한 듯해도 흥분하면 방향을 잃은 대포와 다름없다. 육중한 덩치와 거친 뿔이 만나 내뿜는 힘에 공포가 보태어진다면 주인일지라도 감당이 안 된다. 소보다 센 트랙터의 힘을 빌려 발을 빼냈다. 우사 바닥에 내려진 소는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이내 풀썩 쓰러지고 다시 뒷다리에 힘을 주고 버둥대다 내동댕이쳐졌다. 그러기를 네댓번하더니 체념하고 누웠다. 본능으로 일어서..

달팽이의 꿈

달팽이의 꿈 / 박금선(박금아)(2020 제10회 천강문학상 대상) 지루한 장마였다. 홈통을 타고 내려오는 물소리에 밀려 오랜만에 베란다 청소를 했다. 화분을 밀어내고 물을 부으려고 할 때였다. 황갈색 왼돌이 달팽이 한 마리가 흙 부스러기 위를 한가로이 기어가고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물은 양동이를 떠나 해일처럼 돌진했다. 조난당한 배처럼 파도에 갇힌 신세가 된 달팽이를 건져 모종판에 놓아주었다. 비 오는 날이면 마당으로 나오던 달팽이를 잡아 담장 너머로 내던져 버리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버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정을 내렸다. '그래. 너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갈 때까지 기다려주마. 그만으로도 인연인가. 오며 가며 지켜보게 되었다. 녀석은 낮 동안에는 껍질 속에서 꼼짝않고 있다가 저물녘이면 빠끔..

청에 젖다

청에 젖다// 안 희옥(제9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소리를 따라 새떼가 날아오른다. 천변의 갈대들은 중모리로 춤을 추고 만추의 은행잎이 꽃비처럼 흩날린다. 허공으로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소리가 강물처럼 유장하다. 강이 바라보이는 정자에서 대금연주가 한창이다. 가랑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소리에 취해 하나 둘 모여 든 사람들로 여남은 평 되는 마루가 빼곡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애절한 소리에 듣는 이들의 가슴도 함께 저릿해진다. 무(無)의 공간을 꽉 채운 팔색조 같은 소리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한이 서려 있다. 대금에는 바람을 불어넣는 취구와 음정을 나타내는 여섯 개의 지공이 있다. 취구와 첫 번째 지공 사이에 난 구멍을 청공이라 한다. 이곳에 떨림판 역할을 하는 청을 붙이는데, 갈대 속의 얇은 막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