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생선비늘* 47

왕건길 탐방 후기

왕건길 탐방 후기 특집으로 왕건길을 실었다. 왕건길은 대구 북쪽에 위치한 팔공산 주위를 걷는 여덟 개 구간의 올레길이다. 이곳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역사가 있다. 신라의 요청을 받고 도우러 왔던 고려 태조 왕건은 오히려 팔공산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포위당한다. 동수전투에서 대패한 고려군은 파군하게 된다. 왕건은 신숭겸의 위왕대사(爲王代死)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구사일생 탈주에 성공한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 가득한 울창한 숲속을 거닐며 우리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맛이 즐거웠다. 그 전에 올레길 중 몇 곳은 가본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번에 첫길부터 순차적으로 걸으며 탐방해 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놓고 맞추어 다닌 것은 아니다. 그냥 시간 나는 대로 한 구간도 걷고 두 구간도 걸었..

구사일생길

구사일생길 왕건 8길 중 마지막 길은 구사일생길이다. 초례봉에서 동곡지까지 약 4㎞의 하산 길이다. 초례봉의 명칭은 몇 가지 전설을 지니고 있다. 나무꾼이 초례봉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선녀를 만나 초례를 올리고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설, 왕건이 시량이에서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전열을 재정비해 초례봉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설, 또 호족이 왕건을 알아보고 자기 딸을 아내로 바쳐 초례를 치르게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또 이곳에서 초례를 치르면 반드시 아들을 낳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가팔환초길이 올라가는 길이라면 구사일생길은 내려가는 길이다. 견훤에게 패퇴한 왕건이 겨우 목숨 부지하여 도망간 길이 맞을까. 그렇다면 지금껏 걷느라 힘들어 다리가 휘청거리는 내 발걸음보다 더 힘든 발걸음이 아니었겠나..

오 형제 나무

오 형제 나무 늘 접할 수 있는 산이 바로 옆에 있다는 건 행복한 선물이다. 산에 있는 돌 하나에도 나무 하나에도 나름의 가치와 뜻이 새겨져 있다. 내가 사는 동네 곁에는 욱수골이 있다. 욱수골은 작은 계곡이지만 주위로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등산로가 사통팔달 뻗어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가볍게 등산하며 즐기는 곳이다. 욱수골에는 오 형제 나무가 있다. 나는 한가위가 지난 며칠 후에 오 형제 나무를 보러갔다. 나무를 본지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다. 날씨가 쾌청하여 가을의 상큼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며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내가 이 나무를 처음 접한 지는 한 십 년쯤 되었지 싶다. 산에 오 형제 나무가 있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별로 관심은 없었다...

가팔환초길

가팔환초길 왕건 8길 중 일곱 번째 길은 가팔환초길이다. 매여동 버스 종점에서 초례산 정상까지 약 3.3 ㎞의 오름 길이다. 산속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매여 마을이다. 이곳은 주변 산이 모래가 섞여 매화처럼 흰색을 띠고 있고, 산이 오목하고 매화 모양이라 그 이름을 매여 마을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경북대학교 학술림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오른쪽으로 초례산 입구가 보인다. 입구를 들어서 조금 걸으니 사방댐이 있다.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만든 조그만 댐이다. 댐을 지나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인데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정상이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오르면 오를수록 다리에 힘이 빠진다. 여기저기 미끄러운 마사토가 많아 지친 다리를 더 힘들게 한다. 마사토도 천년 세월 풍화에 제 몸 ..

노란 도시락

노란 도시락 추억은 아픔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나 보다.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어린 시절에 사용하던 노란 알루미늄 도시락으로 음식을 파는 식당을 소개하는 중이다. 식당은 문전성시다. 고객들은 추억을 먹으러 오는 것이라고 말하며 즐거운 듯 웃는다. 어떤 이는 도시락 대신 물 한 모금 마시며 점심을 대신했었다고 멋쩍은 웃음을 날리기도 한다. 가난한 시절을 살아왔던 나에게 노란 도시락의 추억은 슬픈 낭만으로 간직되어 있다. 작은 도시락에도 빈부가 있었다. 부잣집 아이들의 밥은 쌀밥이요, 가난한 집 아이들의 밥은 보리밥이거나 잡곡밥이었다. 부잣집 아이들의 반찬은 콩자반이나 멸치볶음이거나 노란 단무지였다. 가난한 집 아이들의 반찬은 대개가 김치였다. 국물 질질 흘러 밥의 반쯤은 김칫국물로 적셔있다. 그리고 몇몇 아..

호연지기길

호연지기길 왕건 8길 중 여섯 번째 길은 호연지기길이다. 평광동 버스 종점에서 매여동 버스 종점까지 약 5㎞다. 평광 버스 종점에서 호연지기길로 향한다. 이 길은 또한 첨백당(瞻栢堂)으로 가는 길이다. 첨백당은 호연지기길로 들어서는 곳의 이정표를 지나 조금 걸으면 나타나는 아담한 고택이다. 첨백당은 우효중의 효행과 우명식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단양 우씨 재실이다. 1896년에 지어진 충효의 상징적 건물로 지금은 대구광역시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첨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명식 선생의 묘소가 있는 ‘잣밭골(栢田谷)을 우러러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 단양인 우씨가 뿌리를 내리고 대대로 살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우익신이 경기도 여주에서 난을 피해 이곳에 정착하여 ..

이팝나무

이팝나무 동네 뒷산을 자주 오른다. 산 밑으로는 그다지 길지 않은 시골의 신작로 같은 흙길이 쭉 뻗어있다. 저쪽 길 끝에서 달구지라도 나와 덜컹거리며 올 것 같은 시골 정취를 흠뻑 담은 길이 마냥 여유롭다. 어쩌다가 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이 흙먼지를 일으킬 때는 시골의 황톳길을 걷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쭉 뻗은 거리의 한쪽에는 벚나무 가로수가 열병 받는 병사들처럼 일렬종대로 서 있다. 한 달 전쯤만 해도 청명한 하늘에 팝콘이라도 터뜨린 양 하얗게 터진 벚꽃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지금은 길 건너 반대쪽에서 이팝나무가 같은 모양으로 서서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노라면 하얀 쌀밥이 수북한 유기그릇을 보는 듯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이팝나무의 학명은 치오난투스 레투사이..

고진감래길

고진감래길 왕건 8길 중 다섯 번째 길은 고진감래길이다. 백안 삼거리에서 평광동 버스 종점까지 약 5.28 ㎞다. 백안 삼거리에서 왕건길로 접어든다. 며칠간 계속된 불볕더위로 인한 열기가 아직도 식지 않았다. 호젓하게 서 있는 육각정의 백안 쉼터도 더위에 늘어져 그늘막 노릇은커녕 땀을 쥐어짤 듯하다. 무심히 그냥 지나쳐 바로 왕건길로 들어선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니 바로 키 큰 나무들이 그늘을 선사한다. 처음부터 오름길이다. 숨이 턱턱 목까지 차오를 즈음에야 평지길이 나타난다. 조금 숨을 돌리며 걸을만하다 했는데 다시 오름길이다. 이렇듯 산길은 늘 오름과 내림을 반복한다. 고진감래의 기쁨을 누리려면 이 정도의 더위와 이 정도의 헐떡임은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오름길을 다 올랐다는 뜻일까, 깔딱재란 표지판이..

아파트 뒤뜰의 감나무

아파트 뒤뜰의 감나무 베란다 창을 연다. 청량한 가을 공기가 얼굴에 상큼하다. 아파트 단지에도 이미 가을이 깊숙이 들어와 있음이다. 여름의 싱그러움 못지않게 은은히 익어가는 모습이 또 다르게 다가선다. 한껏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돌리는데 건너편 감나무가 나의 시선을 잡는다. 마당 건너 앞 동 건물의 뒤뜰에는 이런저런 나무들과 함께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회색 아파트 벽에 그려진 한 그루의 정물화처럼 말이다. 감나무가 본래 있어야 할 곳은 농촌의 너른 들판이 아닌가. 추수 끝난 벌판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나무의 정경은 자연이 만들어 낸 한 폭의 풍경화다. 잎 다 떨어뜨리고 빨간 알감만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무의 자태는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하다. 감나무만큼 제 열매에 자신감을 갖는 나무가..

인화되지 않은 사진

인화되지 않은 사진 추억이 인화되지 않은 사진으로 가슴에 남아있다. 흐르는 세월에 얼굴은 흐릿해졌지만, 그때의 광경은 기억에 새겨진 명화의 한 장면처럼 더 선명하다. 어느 해 10월 초 연휴였다. 나는 단풍 짙은 가을을 맞아 친구 부부와 함께 산악회에서 모집하는 단체에 가입하여 설악산 등산하러 갔다. 오색 약수터에서 잠을 자고 새벽 다섯 시에 출발했다. 대청봉을 넘어 설악동으로 내려가는 코스였다. 설악제가 열리는 기간이었기에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 앞 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걸어야 할 지경이었다. 마치 전쟁 통의 피난민 대열 같았다. 팀에서 한번 이탈하면 서로 만날 수 없을 만큼 혼잡했다. 나는 친구와도 떨어졌고 오로지 아내만 챙겨야 했다. 얼마간의 간식은 이미 떨어졌고 희운각에 도착해서야 컵라면으로 늦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