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수필모음/경북문화체험 22

소통을 위한 배려

소통을 위한 배려 / 김영희(2016 은상) 골목을 꺾어 고샅길로 접어드니 지엄한 고택이 눈길을 붙든다. 솟을대문에 담장이 높아 깨금발을 하여도 안을 가름할 수 없다. 높은 담장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니 사랑채와 안채가 객을 반긴다. 청도 운강고택은 밀양박씨의 세거지로 안과 밖이 분리된 양반가옥이다. 상하의 구분이 엄격하던 시절 안채와 사랑채가 미음(ㅁ)자형으로 지어졌다. 자연의 산세를 닮은 곡선의 지붕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한옥의 조형미에 눈길은 자연스럽게 안채에 머문다. 안채는 정갈하고 아담하지만 지엄하신 안방마님이 대청마루에서 객의 방문을 맞이할 것 같아 옮기는 발자국이 조심스럽다. 가풍과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한 위엄 잇는 종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안채의 구조는 안방과 대청마루 새색시 거처인 작은 사..

숨구멍, 타포니에 돌을 얹다

2021 은상 숨구멍, 타포니에 돌을 얹다 숨구멍, 타포니에 돌을 얹다/권상연 어머니는 빈손이다. 급하게 나오느라 지팡이를 잊고 손가방마저 잊었다. 행여나 떼놓고 갈까 봐 몸만 따라나선 모양이다. 아흔 줄에 선 어머니의 걸음이 위태위태하다. 한 발짝 뗄 때마다 이마 골 주름도 덩달아 깊어간다. 그 속에 잠긴 수심이 동굴 속 그림자 같아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든다. 골굴사는 사람의 뼈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신라의 고승, 원효가 열반에 든 절이라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풍화되었던 걸까. 암흑색 살점을 다 뜯기고 앙상한 뼈대로만 서 있다. 나뭇가지가 삭정이처럼 내려앉아 거무칙칙하여 기괴해 보인다. 바위의 윤곽선마저 거미줄 친 것처럼 얽혀있어 절이라기보다는 버려진 성..

거울

2021 금상 거울 (12회) 거울/유지호 물소리, 바람 소리가 영혼의 울림처럼 투명하다. 사계절 마르지 않고 흐르는 자계천을 따라 너럭바위가 세월의 깊이를 보듬는 녹음의 호위를 받으며 깔려 있어 선계에 온 듯 신비롭다. 회재 이언적이 이름 짓고 퇴계 이황이 새겼다는 세심대가 선명하다. ‘용추를 이루며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내린 후에야 학문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에 경건해진다. 옥산서원이 눈앞이다. 유생들의 바른 생각이 계절의 붓끝으로 뚝뚝 묻어난다. 자연의 성정을 그대로 닮아 정결하고 단아한 자세로 학문에 전념했던 이언적의 뜻을 기리고 배향하기 위해 서원은 세워졌다. 이언적은 거울이다. 거울은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오직 맑음을 취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진솔하게 ..

돌담, 쉼표를 찍다

2021 대상 돌담, 쉼표를 찍다(12회) 돌담, 쉼표를 찍다/허정진 ‘골목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마시게’* 집과 집으로 이어진 돌담이다. 담장 너머 안주인의 생이 조각보처럼 바느질된 것 같기도 하고, 기승전결이 완벽한 퍼즐처럼 삶의 편린들이 제자리를 찾아 맞춰진 것 같다. 채마밭처럼 푸른 이끼로 덮인 돌담들이 세월의 눈가에 주름진 그리움을 품고 있다. 그 돌담 위로 호박넝쿨이 느릿하게 타고 오른다. 안과 바깥의 경계가 아니라 원래부터 그들의 언덕이고 기둥이었던 것처럼 오래된 생을 끌어안고 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길이 탈출구를 찾아가는 미로 같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순간 나를 잃고 자리에 멈춰 선다. 귀를 기울이고 코를 벌렁거려본다. 뭔가 알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방향과 표..

술잔에 실린 비밀

2015 경북문화체험 은상(6회) 술잔에 실린 비밀/김장배 하얀 벚꽃거리가 눈부시다. 외국인들까지 포석정의 봄을 느낀다. 화사한 바람이 계곡을 따라 흐르다가 길손의 몸을 휘감고 돈다. 골짜기를 가득 메운 소나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들은 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벚꽃은 만개했지만 포석정지는 왠지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옛 영화가 사라진 빈터에는 참새가 날아들어 입방아를 쪼아댄다. 오랜 세월 동안 여울물에 씻겨 조각은 부드럽게 다듬어졌지만, 거무스름한 모습을 보니 찬란한 역사도 침묵에 들면 쇠락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사람도, 건물도 역사 속으로 떠났기에 남아 있는 돌만이 옛일을 기억할 것이다. 때로는 가슴 아린 사연을 품고 혼자 묵묵히 참아 왔으리라. 포석정이 신라가 망하게 된 치욕의 장소..

운문사 규화목

2015 금상 운문사 규화목 운문사 규화목 / 박순태 운문사에 가면 두 그루의 나무를 만나게 된다. 한 그루는 오백여 년을 하루같이 보낸 축 처진 소나무이고, 다른 한 그루는 남중해 파도를 헤치며 인도네시아에서 건너온 화석나무다. 운문사 소나무는 잘 알려져 있지만 화석나무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두 그루 나무를 지켜보니 어디선가 비슷한 한 쌍을 보았다는 기억이 난다.불국사 경내에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비구니 도량에 와서 그럴까, 이색적인 모양과 무늬 때문에 그럴까. 운문사 소나무보다 자그마한 체구에 나뭇결무늬로 온몸을 감싸 안은 화석나무에 스르르 마음이 기운다. 나무에 피돌기가 시작된다. 선명한 나뭇결이 꿈틀대는 실핏줄처럼 생동감을 주면서 은은한 빛을 발한다.나무일까 돌일까를 분간하기 어렵다. 눈은 ..

꿈을 엮어 길을 내다

2015 대상 꿈을 엮어 길을 내다 꿈을 엮어 길을 내다 / 박필우 호방하면서 신비함이 가득하고, 거칠면서 보석 같은 의미가 담긴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영덕 ‘블루로드’입니다. 길 앞에 서면 유랑의 본능이 살아난다고 합니다. 유랑민은 자연을 숙명으로 여기며 떠다녔을 것이지만, 나는 숙명의 절박함이 아니라 생활의 활력을 위해 길을 걷습니다. 잠시 자발적 유랑민이 되어 마주하는 길, 자연과 삶을 아우르는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걸어갑니다. 한 귀퉁이 슬쩍 돌아가면 마법처럼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지치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사춘기적 용기를 떠올리다가 오랜 시간 파편처럼 떠돌다 문득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던 순수한 시절의 꿈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한적하고 촉촉한 외줄기 길을 따라가면 문득 ..

외나무 다리

2016 경북문화체험 은상 외나무 다리 / 강기석 풍경이 되는 다리가 있다. 강물 따라 흐르고, 바람 따라 흔들리다가 문득 머물러 한 폭의 그림이 되는 다리가 있다. ​ 무섬마을 외나무다리는 오래 묻어 둔 감성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삶의 형식이며,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진 서정이다. ​ 마을이 다리를 만들고, 다리가 마을을 불러일으킨다. 다리는 어느덧 환유가 되고 상징이 된다. 다리로 마을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세상과 통한다. 나는 온몸의 감각기관을 허심탄회하게 연다. ​ 다리는 낮다. 마을보다 낮고, 방죽보다 낮고, 그리고 모래밭보다 낮다. 강물이 손을 뻗으면 스칠 만큼 낮다. 낮다는 것은 굴욕이 아니다. 관계의 시작이며 타인에 대한 존경이다. ​나를 통해 타인을 드러낸다. 타자의..

2016년 경북문화체험 금상 씨/박혜경 엊그제 내린 비로 하늘은 더없이 깊다. 그렇게 무덥던 여름도 이제 끝자락. 꽃들은 저마다 화려한 날들을 추억하며 야물고 단단하게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청도 임당리 마을로 배낭을 메고 나서는데 길모퉁이에서 기다리던 도꼬마리 씨가 함께 가자고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진다. 청도 임당리 김씨고택.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씨암탉 한 마리가 반갑게 달려오더니 자기가 기다리던 손님이 아니었던지 잽싸게 달아난다. 김씨고택을 들어서는 담장 길목에는 봉숭아가 꽃잎을 흔들며 객을 반긴다. 울긋불긋 봉숭아 꽃잎 사이로 통통한 씨앗 보따리가 야물게 영글어 간다. 장난기 가득한 바람이 자꾸만 씨앗 보따리를 흔들어댄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임당리 김씨고택은 대대로 내시가 살던 곳으로 집주인의..

꽃살문

2016 경북문화체험 대상 꽃살문/윤상희 화사한 벚꽃길이 길손을 맞이한다. 풍기 나들목을 빠져나와 순흥면에서 벗어나고 있는 길이다. 산골길을 굽이돌아 소백산 국망봉 자락에 다다르자 차 한 대 지나가기 빠듯한 산길이 펼쳐진다. 굽잇길에 들어서자 아랫녘 매화가 향주머니 끈을 풀어놓은 듯 산속의 내음이 풍요롭다. 세속의 소리는 어느새 멀어지고 따스한 봄바람이 옷섶을 열어준다. 인적 드문 산비탈에 이르자 성혈사가 고즈넉이 나를 맞이한다. 절집은 법당 새 채에 스님이 계시는 요사와 수행승방 한 채가 전부이다. 암자라 해도 좋을 소담스런 절의 대웅전 뒤뜰로 부챗살처럼 가지를 펼친 만지송이 장관이다. 세 칸 법당에 달린 보물 832호 꽃살문 여섯 짝을 만나러 아침 먼 길을 달려온 나는 나한전으로 얼른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