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생선비늘*/4부 객기 10

오 형제 나무

오 형제 나무 늘 접할 수 있는 산이 바로 옆에 있다는 건 행복한 선물이다. 산에 있는 돌 하나에도 나무 하나에도 나름의 가치와 뜻이 새겨져 있다. 내가 사는 동네 곁에는 욱수골이 있다. 욱수골은 작은 계곡이지만 주위로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등산로가 사통팔달 뻗어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가볍게 등산하며 즐기는 곳이다. 욱수골에는 오 형제 나무가 있다. 나는 한가위가 지난 며칠 후에 오 형제 나무를 보러갔다. 나무를 본지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다. 날씨가 쾌청하여 가을의 상큼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며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내가 이 나무를 처음 접한 지는 한 십 년쯤 되었지 싶다. 산에 오 형제 나무가 있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별로 관심은 없었다...

노란 도시락

노란 도시락 추억은 아픔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나 보다.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어린 시절에 사용하던 노란 알루미늄 도시락으로 음식을 파는 식당을 소개하는 중이다. 식당은 문전성시다. 고객들은 추억을 먹으러 오는 것이라고 말하며 즐거운 듯 웃는다. 어떤 이는 도시락 대신 물 한 모금 마시며 점심을 대신했었다고 멋쩍은 웃음을 날리기도 한다. 가난한 시절을 살아왔던 나에게 노란 도시락의 추억은 슬픈 낭만으로 간직되어 있다. 작은 도시락에도 빈부가 있었다. 부잣집 아이들의 밥은 쌀밥이요, 가난한 집 아이들의 밥은 보리밥이거나 잡곡밥이었다. 부잣집 아이들의 반찬은 콩자반이나 멸치볶음이거나 노란 단무지였다. 가난한 집 아이들의 반찬은 대개가 김치였다. 국물 질질 흘러 밥의 반쯤은 김칫국물로 적셔있다. 그리고 몇몇 아..

이팝나무

이팝나무 동네 뒷산을 자주 오른다. 산 밑으로는 그다지 길지 않은 시골의 신작로 같은 흙길이 쭉 뻗어있다. 저쪽 길 끝에서 달구지라도 나와 덜컹거리며 올 것 같은 시골 정취를 흠뻑 담은 길이 마냥 여유롭다. 어쩌다가 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이 흙먼지를 일으킬 때는 시골의 황톳길을 걷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쭉 뻗은 거리의 한쪽에는 벚나무 가로수가 열병 받는 병사들처럼 일렬종대로 서 있다. 한 달 전쯤만 해도 청명한 하늘에 팝콘이라도 터뜨린 양 하얗게 터진 벚꽃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지금은 길 건너 반대쪽에서 이팝나무가 같은 모양으로 서서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노라면 하얀 쌀밥이 수북한 유기그릇을 보는 듯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이팝나무의 학명은 치오난투스 레투사이..

아파트 뒤뜰의 감나무

아파트 뒤뜰의 감나무 베란다 창을 연다. 청량한 가을 공기가 얼굴에 상큼하다. 아파트 단지에도 이미 가을이 깊숙이 들어와 있음이다. 여름의 싱그러움 못지않게 은은히 익어가는 모습이 또 다르게 다가선다. 한껏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돌리는데 건너편 감나무가 나의 시선을 잡는다. 마당 건너 앞 동 건물의 뒤뜰에는 이런저런 나무들과 함께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회색 아파트 벽에 그려진 한 그루의 정물화처럼 말이다. 감나무가 본래 있어야 할 곳은 농촌의 너른 들판이 아닌가. 추수 끝난 벌판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나무의 정경은 자연이 만들어 낸 한 폭의 풍경화다. 잎 다 떨어뜨리고 빨간 알감만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무의 자태는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하다. 감나무만큼 제 열매에 자신감을 갖는 나무가..

인화되지 않은 사진

인화되지 않은 사진 추억이 인화되지 않은 사진으로 가슴에 남아있다. 흐르는 세월에 얼굴은 흐릿해졌지만, 그때의 광경은 기억에 새겨진 명화의 한 장면처럼 더 선명하다. 어느 해 10월 초 연휴였다. 나는 단풍 짙은 가을을 맞아 친구 부부와 함께 산악회에서 모집하는 단체에 가입하여 설악산 등산하러 갔다. 오색 약수터에서 잠을 자고 새벽 다섯 시에 출발했다. 대청봉을 넘어 설악동으로 내려가는 코스였다. 설악제가 열리는 기간이었기에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 앞 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걸어야 할 지경이었다. 마치 전쟁 통의 피난민 대열 같았다. 팀에서 한번 이탈하면 서로 만날 수 없을 만큼 혼잡했다. 나는 친구와도 떨어졌고 오로지 아내만 챙겨야 했다. 얼마간의 간식은 이미 떨어졌고 희운각에 도착해서야 컵라면으로 늦은 ..

속미인도(俗美人圖)

속미인도(俗美人圖) 대구 미술관에서 ‘간송 조선회화 명품전’이 열리고 있다. 간송은 일제강점기 때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서화와 골동품 등을 수집한 사람이다.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석탑, 석불, 불화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도 힘을 썼다고 한다. 그의 소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 신윤복, 김홍도, 장승업 등의 회화 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 불상, 석불, 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지인들 몇몇이 어울려 간송의 명품들을 보기 위해 갔다. 조선 시대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많이 걸려있다. 신윤복의 미인도 앞이다. 그림을 잘 그렸는지 미인도가 품격이 있어서인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마치 신윤복 회화전인 듯 안..

엉덩이 매혹

엉덩이 매혹 그녀는 꽉 낀 청바지를 입었다. 길가에 세워놓은 몸매가 예쁜 아가씨의 광고 사진이 눈길을 끈다. 예쁜 얼굴이 아니라 매혹적인 엉덩이의 모양을 강조한 모습이다. 요즈음 여인의 매력은 엉덩이에 있다는 듯 엉덩이의 아름다움을 맘껏 뽐낸다. 몇 년 전에 인기 걸 그룹 소녀들이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드는 춤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적이 있다. 어디 소녀들뿐이겠는가, 요즈음은 주부 가수들도 노래를 부르며 엉덩이춤을 추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아니 그 옛날 뺑덕어멈도 광목 치맛자락 허리에 바짝 휘감으며 커다란 엉덩이를 좌우로 씰룩거리며 남정네를 유혹하지 않았던가. 남자들은 여자 엉덩이의 매혹에 열광한다. 어떤 이들은 엉덩이의 생긴 모양으로 그 형태를 분류하기도 한다. 그중에 여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성매매

성매매 내가 성매매 여성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학위 논문 때였다. 내가 쓰겠다고 제출한 논문 주제를 본 교수님은 자료 준비는 충분히 되었느냐고 물었다. 사실 준비가 많이 부족한 상태였고 쓰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지도교수는 성매매 여성에 대하여 써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논문 주제가 예사롭지 않아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번 고민은 해보겠노라고 대답했다. 성매매라는 단어가 께름칙하기도 하고 내가 소화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당황하면서도 한편 호기심도 동했다. 그래서 한번 써보겠노라고 용기를 냈다. 지도교수는 성매매 여성들한테 받은 설문조사 자료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현실적으로 성매매를 시대의 필요악으로 보아 성매매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려 했다. 그러나 교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

밑동에 핀 꽃

밑동에 핀 꽃 만화방창 꽃의 계절이다. 목련이 지는가 싶더니 지금은 벚꽃이 한창이다. 길가에 만발한 벚꽃이 가던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에 하얗게 터지는 꽃송이들이 팝콘을 뿌려놓은 듯 장관이다. 벚꽃에 취해 발걸음조차 휘청거린다. 길가의 노거수 같은 벚나무들도 어김없이 꽃을 피웠다. 어느 벚나무 아래를 지날 때였다. 나무뿌리에 낙화인 듯 꽃송이 몇 개 붙어있다. 멈추어 자세히 보니 그것은 떨어진 꽃이 아니라 나무 밑동에서 핀 꽃이었다. 영양분을 줄기와 가지로 보내지 않고 뿌리에서 바로 꽃을 피운 듯 소담하게 피어있다. 어느 계곡 바위틈에 홀로 피어난 이름 없는 야생화처럼. 나는 엊그제 먼지 수북이 쌓인 책장을 정리하다가 누런 봉투를 하나 발견했다. 슬쩍 열어..

객기(客氣)

객기(客氣) 날씨가 변덕이다. 입동이 지났는데도 그동안 따뜻한 가을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 한파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방송의 일기예보에서는 내일은 더 춥다고 하니 얼마나 움츠러들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아파트 담장엔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으니 말이다. 개나리가 따뜻한 날씨에 그만 잠시 계절을 착각했을까. 아니면 추위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란 자만감에 객기라도 부린 것일까. 몸 움츠리고 두런거리는 개나리가 애잔해 보인다. 십여 년 전, 그해의 마지막 달이었다. 회사는 구조조정의 회오리에 함몰되어 있었다. 회사를 통폐합하는 작업이기에 구조조정의 폭은 컸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노동조합은 통폐합 반대 투쟁으로 날을 샜다. 여기저기 붉은 깃발은 찢어진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