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생선비늘*/3부 구멍담 9

아파트 열쇠

아파트 열쇠 나 홀로 아파트 거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유월 초순에 내리는 비가 봄비처럼 촉촉하다. 아내는 조금 전에 친구를 만난다고 우산을 들고 나갔다. 건물 어딘가에 모여 흐르던 빗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또닥또닥 방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같다. 나는 찰싹거리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옛 생각에 잠긴다. 나는 어려서부터 집 없는 설움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았다. 우리 가족은 한국전쟁 중에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었다. 그때 우리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먹고사는 것에 급급한 삶이었다. 그러다가 정착한 곳은 인천 앞바다의 조그만 섬이었다. 어떻게 집을 장만하였는지 몰라도 우리는 단칸방의 초가가 우리 집이었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집이 작고 초라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밖에서 뛰어놀다가 날..

어떤 경험

어떤 경험 TV를 켠다. 프로야구 경기가 한창이다. 경쾌하고 빠른 비트의 음악이 운동장에 가득히 울려 퍼진다. 경쾌함을 넘어 요란하기조차 하다.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어대는 날씬하고 예쁜 아가씨들의 율동이 멋지다. 아가씨들의 율동에 맞추어 짝, 짝 박수 소리가 우렁차다. 운동경기를 보러 온 관객들은 전부 응원단이 된다. 운동장에는 이들의 응원을 받으며 열심히 뛰고 있는 선수들이 있다. 응원을 유도하는 아가씨들을 치어걸이라 한다.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보다 짧은 치마를 입고 리듬에 맞추어 발랄하게 춤을 추는 치어걸들에게 더 시선이 간다. 그녀들을 보고 있자니 꽤 오래전의 어떤 경험이 생각난다. 회사는 봄, 가을로 체력단련 행사를 했다. 야외 단련을 할 때는 부서별로 등산하러 가기도 하고, 어디 모여..

친구의 빈자리

친구의 빈자리 작열하던 태양이 노을을 뿌리며 수평선 아래로 숨어든다. 무덥던 열기가 식으며 생동하던 바다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하얗게 일렁이는 작은 파도는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여주는 경계선이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여기저기 시커먼 바위들이 웅크린 동물처럼 괴기스럽다. 사위는 조용해 적막강산이고 파도 소리만이 음률처럼 찰싹거린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백사장에 쳐놓은 천막으로 들어와 눕는다. 백사장에 찰싹이는 해조음이 슬픔처럼 애잔하다. 여기저기 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파도 소리가 어떤 외침처럼 귓가를 때린다. 친구와 둘이서 오랜만에 온 바닷가다. 시끄러운 해수욕장을 벗어나 인적 드문 조그만 모래톱에 천막을 친 것은 예나 다름없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파도 소리가 정겨워야 하건만 듣는 마음이 편치 않다. ..

반포지효(反哺之孝)

반포지효(反哺之孝)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이 훤하게 밝다. 커튼을 밀어내고 밖을 내다보니 주위의 건물들과 도시 풍경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 집이 아니라 일본의 어느 호텔 방이다. 아이들 손에 이끌려 여행을 왔다. 눈을 일찍 떴기에 아침 식사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답답한 방에 있는 것보다는 호텔 근처라도 한 바퀴 돌고 싶어 아이들을 남겨놓고 아내와 함께 숙소를 빠져나왔다. 호텔 앞으로는 바닷물이 통하는 폭이 넓지 않은 운하가 있고 다리를 잠깐 건너면 소공원이 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시원한 아침 바람을 쐬고 들어오기로 했다. 공원의 긴 의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니 맑은 가을 하늘에 햇살이 영롱하다. 저만치 떨어진 의자에는 노숙 노인들이 잠에서 깨어 침구를 정리하고 있다. 옆에서 무언가..

옛날식 다방을 생각하며

옛날식 다방을 생각하며 사라져가는 것은 아쉽다. 더구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과 밀접했던 것이라면 그 아쉬움은 더 커진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방이 사라지고 있다. 시내를 걷다가 어쩌다 다방이란 간판을 보면 스러져가는 폐가의 택호를 보는 듯 애잔하다. 그래도 가슴을 따스하게 하는 정겨움이 있어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된다. 내가 다방을 처음 들어가 본 기억은 고등학생 때인 것 같다. 어떤 행사가 있어 친구들이 모였는데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몇몇이 어울려 주위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조금 걸으려니 다방이 보였다. 그런데 다방에서 시화전을 한다고 한다. 다방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하던 차에 떳떳하게 들어가 볼 수 있는 구실이 생긴 것이다. 오전이라 그런지 손님은 없었고 예쁘고 세련된 아가씨가 혼자 있었다...

방언유희(方言遊戱)

방언유희(方言遊戱) 방언의 사전적 의미는 표준어와는 다른, 어떤 지역이나 지방에서만 쓰이는 특유한 언어이다. 그렇다고 하여 표준어와 방언이 우열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은 지역마다 고유의 방언을 찾아 재미있는 이야기로 승화시키는 작업도 한다. 나에게도 방언으로 인한 추억이 있다. 방언 때문에 생긴 어긋난 소통은 군대에서 먼저 경험했다. 그때는 중대 교육이어서 전 중대원이 다 모인 장소였다. 교육을 주관하는 소대장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소대장이 어느 분대장을 특정하여 큰 소리로 불렀다. 소대장의 심기를 간파한 분대장은 ‘야~’하고 잽싸게 대답하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야!’, 소대장한테 야라니, 하며 엉뚱한 트집으로 소대장은 화풀이하듯 분대장을 윽박지르며 발로 걷어차기도 하며 야단법석이었..

진골목

진골목 진골목은 긴 골목이란 뜻이다. 대구 중심가인 반월당 근처 종로에 현존하는 근대 골목이다. 종로는 지금의 번화가인 반월당과 동성로에 그 위상을 내어주기 전까지 대구의 중심지였다. 또한, 멀지 않은 곳에 경상감영이 있어 이 일대가 조선 시대에도 중심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은 또 근대 초기 대구의 부호들인 달성 서씨들의 집성촌이었다. 예전부터 대구 부자들이 살던 동네라 큰 건물들이 들어섰기에 대구의 가장 번화가인 중앙로보다 집값이 훨씬 비쌌다고 한다. 지금도 여기저기 근대화될 때의 건물들이 현대 건물과 어우러져 유적처럼 남아있다.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이곳은 요즈음 기성세대와 젊은이들이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처음 진골목이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골목이 길기에 이름마저 긴 골목이라 했을..

자유공원

자유공원 자유공원은 인천에 있는 공원이다. 이 공원은 조선조 말에 외국인에 의해 설계되어 세워진 근대공원이다. 인천에 있는 외국인들을 위한 공원으로 조성하였고, 그 이름도 만국공원이었다. 내가 이 공원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즈음 공원 이름이 자유공원으로 바뀌었다. 나는 시골에 살다가 인천으로 이사를 했는데 내가 다닌 초등학교가 공원 너머에 있었다. 공원은 유원지이기도 하면서 교통의 요지였다. 많은 길이 공원을 통하게 되어 있어 통행하는 사람이 많았고 차도 많았다. 그래서 공원에 놀러 오는 사람보다 그곳을 통과해 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인천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이 자유공원을 넘어 다니며 인연을 이어갔다. 그래서 내 젊은 시절의 기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그..

구멍 담

구멍 담 담장은 안과 밖을 가로막는 벽이다. 그렇지만 담장에는 소통을 위한 틈새도 있다. 언젠가 송소고택을 다녀온 적이 있다.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자리한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심처대(深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건축한 가옥이다. 우리 조상의 후덕한 인심처럼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위에 홍살까지 설치해 놓은 거대한 솟을대문이 낮은 담장과 대비되어 오히려 기이한 모양새다. 마치 입을 크게 벌려 상대를 제압하려는 하마의 입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새 나왔다. 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설주에 기대선 행랑채에서 허술한 옷차림의 행랑아범이 머리를 조아리며 손님이라도 맞으러 나올 듯했다. 행랑아범 대신 품이 넉넉한 시골 마당이 평화롭게 손님을 맞이했다. 99칸 저택의 규모가 이런 것이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