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생선비늘*/1부 생선비늘

매호천의 봄

취송(翠松) 2022. 3. 12. 09:22

매호천의 봄

배산임수라 했던가. 매호천은 우리 동네가 품고 있는 젖줄 같은 하천이다. 이 하천은 내가 처음 이곳에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살아있는 하천이었다. 비라도 한바탕 내린 후에는 피라미, 붕어, 미꾸라지 같은 물고기들이 꼬리를 흔들며 놀았다. 물고기를 본 아이들은 신기한 무엇이라도 본 듯 즐거워했다.

동네는 점점 커졌고 고층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도시의 발전은 역기능도 있다. 새로운 건물들이 샘솟는 물줄기를 막아버렸는가 보다. 어느새 비가 와야만 물이 흐르는 사막의 와디처럼 건천이 되어버렸다. 물이 흐르지 않는 하천은 낡은 건물을 보는 듯 삭막했다. 무너져 내리는 강둑엔 잡초마저도 견딜 수 없었다.

그랬던 하천이 탈바꿈했다. 몇 년 전에 정부의 고향의 강사업에 선정되어 건물을 개축하듯 하천 복원공사를 했다. 깨끗하게 물줄기를 정비하고 아래쪽에 흐르는 금호강 복류수와 이웃한 남천을 통해 물을 공급받아 항시 물이 흐르는 자연하천으로 되살아났다. 강변을 정비하여 산책로를 만들었다. 산책로를 걸으며 흐르는 물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에 쌓인 더께가 씻기는 듯 마음도 상쾌해진다.

골 따라 흐르는 물은 이웃 경산에서 흘러오는 남천과 만나 한 물이 된다. 합수된 남천은 바로 금호강과 만난다. 물줄기는 작아도 그곳은 세 물이 만나는 합수머리다. 길가에는 흘러온 토사가 만들어낸 아담한 둔치도 있다. 둔치에는 제멋대로 자란 여러 가지 잡풀들이 이런저런 꽃을 피우며 볼거리를 제공한다. 매호천과 남천을 머금은 금호강은 대구 변두리를 유유히 돌아 흐르며 본류인 낙동강과 만난다. 모든 지류를 흡수하여 몸피 불린 낙동강은 고향으로 되돌아가듯 바다를 향하여 흐른다.

천변에서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를 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동안은 삭막한 겨울이었다. 마른 나뭇가지에 걸려 우는 바람 소리만 윙윙거렸다. 새들도 떠나가고 마른 풀만이 서걱거렸다. 배고픈 오리들이 긴 주둥이로 숨어있는 물고기를 찾느라 차가운 물에 머리를 박고 허우적거렸다. 패딩 차림의 운동하는 사람들만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겨울을 이겨내고 있었다.

매호천에 봄이 왔다. 봄은 저 멀리 낙동강 하구에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왔다. 따뜻해진 태양에 얼었던 물이 녹아 흐르며 뭇 생명을 깨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하나둘 아침저녁으로 천변에 모여들었다.

아침 햇살이 좋은 날에 나도 천변을 걸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이 용의 비늘인 양 꿈틀댔다. 사라졌던 물고기가 돌아왔다. 물 깊은 곳에서는 물고기들의 군무가 요란했다. 겨우내 물고기들은 어디서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을까, 오리들은 어느새 물고기 사냥을 위해 물질하기에 바쁘다. 왜가리와 백로는 얕은 물에서 긴 다리를 껑충거리며 물고기를 쫓아다닌다.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있는 물고기의 운명이니 어쩌겠나.

풀 말라 흙바람 불던 땅에 파릇파릇 새싹이 연둣빛으로 흩날렸다. 냉이가 피운 하얀 꽃이 풋풋하다. 여기저기 노란 유채화가 싱그럽다. 민들레꽃은 어느새 수를 다하고 홀씨 되어 흩날린다. 겨우내 죽은 것 같던 노거수의 굵은 밑동에서 연한 새잎이 돋는다. 생명의 부활인 듯 솟아나는 조용한 함성이다. 밑동에서 솟아나는 연한 잎을 보니 몇 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동네 산자락을 걷고 있었다. 계절은 지금처럼 봄이었다. 어느 굴참나무 고목의 밑동에서 새싹이 연둣빛 고운 잎으로 고개를 쏘옥 내미는 모습이 앙증맞았다. 손녀로 보이는 어린 소녀와 할머니가 여린 새싹을 보았다. 그리고 할머니의 넋두리가 내 귀에 들렸다. ‘나무는 이렇게 죽었다가도 살아나는데·····,’ 그때 그 말이 왜 그렇게 애절하게 들렸던지. 지금도 나의 뇌리에 흔적으로 남아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새싹이 돋는 것을 주검이 되살아나는 것으로 보는 할머니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할머니는 아마도 지금의 내 나이 정도 되었으리라.

언젠가부터 나는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동작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게 힘겨워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일어나야 한다. 무릎이 빨리 펴지지 않아 몸을 기우뚱거리며 간신히 일어나고는 한다. 언제부터 내 한 몸 가누기도 버거워 삐걱거리는 몸이 되었는가. 아내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계절이 겨울로 접어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아릿하다. 지금도 내 마음의 아내는 언제나 풋풋한 봄인데 말이다. 아내도 노거수 밑동에서 올라오는 샛노란 잎새처럼 몸에서 새 기운이 솟아나기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 계절이 바뀌듯 인생에도 봄의 계절이 다시 오려나. 그래, 인생의 봄은 마음으로 오는 것이 아니겠나. 마음에 꽃을 피우면 봄이요, 마음에 눈이 내리면 겨울이 될 것이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아내와 함께 봄기운 가득한 냇가로 나갔다. 세월을 따라가듯 물 따라 매호 천변을 걸었다. 이내 깔린 저녁의 봄 향기가 은은하게 흘렀다. 저녁 햇살에 물비늘이 희망처럼 반짝거렸다. 넓게 펼쳐진 자갈 위를 잘잘거리며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에 고막이 시원해진다. 징검다리 사이로 모였다 떨어지는 물소리가 폭포 소리인 듯 가슴이 뻥 뚫린다. 누렇게 말라버린 잔디 위에도 어느덧 새파란 새싹이 돋아나고 억새와 갈대는 이미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있도록 훌쩍 자랐다.

내 가슴에도 봄을 풀무질해보자. 어디서 날아오는 꽃향기가 은은하다.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앞질러 간다. 아무렴 어쩌랴, 우리 나름의 걸음으로 가면 될 것을. 물 위를 스쳐 온 봄바람이 몸속으로 스며든다. 고목에서 돋아나는 새싹처럼 가슴에서 새봄이 움튼다. 매호천의 봄이 마냥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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