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수필모음/멋진 수필

2016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취송(翠松) 2016. 1. 13. 11:36

비를 기다리는 마음//손 훈 영/대구매일

 

두툼한 먹구름이 빠르게 이동한다. 하늘의 허파가 용트림을 하며 짧고 강한 바람을 쏟아낸다. 번갈아 쉬는 들숨과 날숨 사이로 당장이라도 엄청난 비를 퍼부어 댈 것 같다. 비의 숨 냄새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비가 오면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정체불명의 힘이 솟아난다. 드물게 몸과 마음이 활력으로 탱탱해진다. 오늘은 비의 예감만으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달릴 채비를 한다. 막힘없이 달려 보기에는 고속도로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가까운 인터체인지로 차를 올린다. 목적지는 없다. 비를 맞으며 실컷 달리다 그만 달리고 싶을 때 돌아오면 된다.

비 탄다는 말이 있다. 맑은 날과 비교해 비 오는 날의 심리상태가 유난히 다른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는 습기에 특별히 민감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흘려 넘겨 버리는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쉽게 상처를 입는다. 꿈속에서도 줄곧 비가 내리고 찬란한 햇빛 아래서는 현기증을 느낀다.

빗줄기가 사다리처럼 하늘까지 이어진 날, 그런 날은 모든 것에 조금 더 너그러워진다. 쨍한 햇살 아래서 악착같아지던 마음과는 대조적이다. 닿을 듯 가까워진 하늘이 강퍅하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팍팍한 마음보다는 너그러운 마음일 때가 더 평화와 가깝지 않겠나.

자동차는 거침없이 달린다. 드디어 전면 창으로 빗방울이 투덕거린다. 아스팔트가 거뭇하니 젖어온다. 내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 안의 빗방울들은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에 이끌린다. 오랜 그리움 뒤 연인과의 해후처럼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고 가슴 전체가 따뜻해져 온다.

대기를 장악한 빗방울들의 드라마가 풍성하다. 와 쏠리듯 다가와 파열하듯 장렬하게 부서져 내린다. 녹음을 머금은 진초록 유리창 위로 방울방울 사념들이 매달린다. 온몸을 에워싸는 빗방울이 혈관에 주입되는 링거액처럼 메마른 정신을 빠르게 타고 돈다.

맑은 날보다는 어둑시그레 비 오는 날이 더 좋은 것은,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몇 가지 정서 가운데 하나이다. 두 날의 심리적 대비가 너무 도드라져, 한때는 런던이나 파리나 뮌헨 같은 곳에서 살고 싶기도 하였다. 늘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자주 가랑비가 오락가락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럽의 그 도시들을 동경해 보기도 하였다.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가로수의 춤은 더 격렬해진다. 서서히 타이어에 들러붙는 아스팔트의 질감도 달라진다. 차체와 도로가 한 덩어리로 밀착되며 어느덧 속도감마저 사라진다. 점차 우주적 진공 같은 것이 느껴진다. 자질구레한 잡념들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마침내 나는 느낌표 하나로 존재한다.

아름다운 음악과 감동적인 영화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만큼 비 또한 그렇다. 훌륭한 영화가 마음을 한껏 드높여 주듯 비도 정신과 영혼을 한 단계 상승시켜 준다.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와도 같은 영화를 보고 났을 때, 그 이전과 달라진 자신을 느끼지 않는가. 그때의 고양된 느낌은 욕망으로 얼룩진 우리 존재를 정화시켜 준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빗줄기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노라면, 와이퍼가 지나간 유리창처럼 말간 마음이 된다. 유난히 비를 탄다는 것은 남다르게 마음의 정화가 필요하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정화에의 요구가 유달리 강하기에 마음을 씻어 낼 수 있는 비 오는 날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마음의 정화 욕구가 남다르다. 그것은 그만큼 상처받기 쉬운 마음의 소유자라는 말이기도 하다. 존재하느라 으깨어진 상처의 파편들이 누구보다도 많기에, 그것들을 걸러 내는 작용이 더 자주 요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날 홀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문득 삶과 죽음에 대한 감각이 환해져 온다. 동그란 핸들에 목숨을 얹고 어둑한 하늘을 향해 질주하노라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단순하게 정리되면서 많은 것들로부터 초탈한 심정이 된다.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미약하고 가뭇없는 존재들인지 뼛속 깊이 느껴지기도 한다. 풀과 같이 약한 생명이기에 지금, 살아서, 힘차게 내 심장에 대해 그만 숙연해지고 만다.

거대한 덤프트럭이 물세례를 퍼부으며 바짝 다가와 비켜 지나간다. 움찔하며 핸들을 다잡는다. 그렇다. 비 오는 날의 고속도로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확실한 긍정을 확인시켜 주는 공간이다. 시속 백 킬로미터의 속도감으로 펼쳐지는 비에 젖은 도로는 보다 더 본질적으로 살아갈 힘을 재생시켜 준다. 생명만이 진실이기에 누추한 욕심들이 떨어져 나가고, 검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향해 애틋한 마음이 된다. 비를 뚫고 도로를 가로질러 천천히 날아가는 흰 새를 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하늘에 닿는 문장을 쓰고 싶어지기도 한다.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것처럼 비를 기다린다. 햇빛 화창한 날에도 무슨 부적처럼 우산을 챙겨 들고 간절히 비를 기다린다. 비는 보이지 않는 실존적 물음에 마음껏 탐닉할 수 있게 해 준다. 삶이 무엇인지, 답 없는 답을 찾기 위해 영화관을 찾고 도서관을 드나들며 온몸에 비의 지문을 찍으며 거리를 헤매기도 한다. 예리한 비의 지문은 머릿속에 부식된 붉은 녹들을 벗겨 내고, 가슴속의 두터운 지방질을 뚫어 초록빛 생명의 감수성을 일깨운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된다. 나날의 상처와 황폐함에도 이어질 것이다. 폭력과 무관심이 도처에 횡행해도 불친절한 우리네 하루는 안이하게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 위로 오늘도 비가 내린다.

 

 

이중주//손훈영 2016 전북일보 신춘 수필 당선작

눈부시게 환한 햇살이 초록 숲 위로 투망처럼 드리워져 있다. 베란다 창 앞으로 바투 다가와 있는 산은 이제 마악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창을 열어두고 다가오는 여름을 바라본다.

, , 열어 둔 창으로 테니스공이 라켓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 부딪히는 소리 사이사이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섞여든다. 힘껏 내리친 공이 빗나갔는지 안타까운 탄식이 터지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게 공을 받아쳤을 때의 환호성이 높다랗게 들려오기도 한다.

베란다로 나가 테니스장을 내려다본다. 높푸른 히말라야시다의 호위를 받고 있는 테니스장은 치외법권 지역인양 아늑하다. 알맞게 다져진 맨 흙바닥이 정갈하고 높다란 심판석 의자의 진초록 덮개가 새뜻하다.

연두색 공들이 네트 위를 빠르게 오간다. 황토빛 흙을 박차고 하얀 운동복이 튀어 오른다. 튕겨 오르는 공을 따라 공기를 가르는 사람들의 그을린 허벅지 위로 햇살이 작열한다. 약동하는 생명력이 라켓 한복판에서 전율하고 터질 것 같은 율동성이 코트를 가득 메우고 있다.

운동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소리로 흥건한 테니스장을 벗어나 시선을 조금 오른편으로 옮긴다. 봉긋한 봉분 세 개를 감싸 안고 있는 야트막한 동산이 보인다. 조밀한 숲을 병풍처럼 두른, 나무 없는 낮은 구릉은 푸른 풀들이 융단을 깐 듯 부드럽게 펼쳐져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공기 중에 보랏빛 풀꽃들이 고요하다. 이따금 비롱비롱 산새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날아든다.

투명한 햇살 아래 둥그렇게 누워있는 봉분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생로병사의 긴 여로를 마감한 삶은 이제 비로소 진정한 안식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훼손시킬 수 없는 견고한 평화다. 살면서 늘 갈구하던 그것을 이윽고 품안에 안고 흔들림 없는 침묵으로 고요하다.

봉분은 하나의 메시지다. 비등점에 이를 때까지 열렬히 살라고, 그리하면 마침내 이런 확실한 것 하나 안겨 주겠다는 신의 약속이다. 약속은 적요한 햇살 아래 명확하게 빛나고 있다. 저 약속들은 이미 도처에 새겨져 있었다. 다만 두려워 우리들이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네 삶의 공간으로부터 멀리 추방시켜 놓았었다. 죽음에 등을 기대고 살아가지만 삶이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어야만 우리들은 살아갈 수 있었다.

얼마 전 중병을 선고받음으로써 죽음과 좀 더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투병의 시간이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들이다. 나와는 별 상관이 없던 그것이 이제 불가분의 관계로 가까워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어둠이 더 무서워지듯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죽음을 바로 볼 수 밖에 없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바로 죽음이다. 죽어있는 상태로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런 마음이어선지 요즘 들어 잔치에는 잘 가지 않아도 죽음의 장소는 열심히 찾아다닌다. 가까운 친인척 장례식에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먼 친척까지 문안을 간다. 정기 진료일이면 병원 장례식장을 서성대다 오기도 한다. 쇠락의 냄새와 죽음의 기미에 점점 익숙해지고 마침내 그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무엇으로 내 일상에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며칠 전 시백부 상을 치렀다. 입관을 지켜보았다. 입관실은 삶과 죽음이 아무런 갈등 없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주검 옆에 싱크대와 세제가 천연덕스럽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에 익숙한 세제와 핸드크림이 삶과 죽음과의 거리를 빠르게 단축시켜 주었다.

 

전통적 예법에 준한 절차로 구순을 넘긴 백부는 봉인되었다. 딸들의 흐느낌이 백부의 감긴 눈 위로 흩어졌다. 차가운 테이블 위에 일자로 누운 백부의 한 줌 몽뚱아리를 겹겹이 싸매고 묶는 절차가 당연한 수순을 밟는 듯 자연스러웠다.

장례관리사들의 일상적인 표정과 직업적 몸짓이 한 사람의 죽음에 압도당해 있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럴 거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살아있음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죽음이 저 먼 곳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누수로 얼룩진 천장이나 수도꼭지만큼이나 우리들 삶 속에 가까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과실 속에 씨가 들어있듯 시작될 때 이미 죽음도 함께 잉태되었다'는 릴케의 말이 생각났다. 삶 속에 죽음이 있다는 말이 하나의 관용구어가 아니라 생생한 느낌으로 피부에 와 닿았다.

삶과 죽음은 서로 동떨어진 무엇이 아니라 표면과 이면이었다. 삶이 끝난 다음에 비로소 죽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시작되면서 죽음도 함께 시작되었다. 삶이 무르익으면 죽음도 함께 무르익었다. 사람은 삶만 사는 게 아니라 죽음도 함께 살아야 했다. 결국 잘 산다는 것은 잘 죽는다는 것이었다. 잘 죽을 수 있으려면 잘 살아야 함이 전제되었다.

죽음의 절차를 지켜보며 살아갈 일을 생각하는 나를 보았다. 죽은 자를 보내는 시간 속에서 산 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생각했다. 그것은 어떤 진실한 약속 하나를 하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떠나는 자에게 남아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약속은 무엇일까. 당신 곁으로 갈 때까지 더 멋지게 살아 가겠다는 새김질이 아닐까.

막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에게 하는 약속은 신에게 하는 약속이나 진배없었다. 혹 이것이 죽은 자에 대한 산 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조문행위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염을 하고 입관을 하고 성복제를 지내는 의식들이 이어지는 그 시간만큼 나 자신이 삶에 대해 열렬해지던 때가 또 있었을까. 명확한 죽음 앞에서 삶도 명확해졌다.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자의 육신을 눈앞에 두고 삶에 대해 열심을 다짐하는 오롯한 시간이었다. 내 다짐이 더 뜨겁고 간절할수록 장례의 의미는 깊어지고 죽은 자와의 관계는 더 두터워졌다.

우리 집 베란다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전망을 안고 있다. 왼편 테니스장은 살아있음을 음미하기에 좋고 오른편 봉분은 죽음을 명상하기에 더 할 나위 없는 풍경이다. 생사가 원래 같이 가는 것이라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삶의 충동인 테니스장과 죽음의 집인 봉분이 환한 햇살 아래 거리낄 것 없이 어우러지고 있다. 귀를 열면 약동하는 생명의 환호성을 들을 수 있고 눈을 돌리면 언제나 고즈넉한 봉분을 마주 볼 수가 있다. 삶과 죽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전망이 이 공간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십년 넘게 이 집을 지키고 있다.

산책길일까, 테니스장과 야산 사이의 작은 오솔길로 초로의 할아버지와 예닐곱 손자가 손을 맞잡고 올라간다. 호기심 많은 손자의 해찰에 할아버지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호흡을 고른다. 그들 속에 삶이, 또한 죽음이 있다. 삶과 죽음의 두 얼굴이 사이좋게 그들의 등 뒤를 따르고 있다.

 

물미장//류현서 전북도민일보

객주 문학관에 들어섰다. 농기구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다들 투박하면서도 고집스러운 그 시대의 사내를 닮았다. 지게 앞에 작대기 하나가 길게 누웠는데, 밑 부분에 뾰족하게 박힌 쇠가 보인다. 지게와 작대기를 보니 평생 짐을 진 아버지의 삶에 가 닿는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번도 없이 전장에 배치되었다. 낯선 골짜기에서 전우들이 하나둘 쓰려져도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셨다. 전쟁이 휩쓸고 간 뒤라서 남은 것이라고는 기근과 상처뿐이었다. 많은 식솔이 먹고살려면 산골짜기 비탈이라도 개간해야 했다. 물길을 따라 일구다 보니 천 평이 될까 말까 한 논이 자그마치 쉰하고도 다섯 다랑이나 되었다.

  말이 좋아 논이지 기름진 밭보다 못했다.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만들었기에 논바닥이라야 함지박만 했다. 가족에게 목숨 줄과 같기에 아버지는 문전옥답으로 여기며 농사를 지었다. 살얼음이 녹기도 전에 못자리를 하고 나서부터 논으로 가는 날이 잦아졌다. 안방보다는 산골짜기가 편한지, 아버지가 논에 가지 않는 날은 밥에 뉘같이 드물었다.

  아버지의 지게는 유난스레 높았다. 짐을 많이 싣기 위해, 지겟가지 중간을 가로지르는 까막서리 양쪽으로 다른 막대를 덧대 묶어 높이를 더했다. 그러고는 누렇게 익은 나락을 지게 위에 쌓아올렸다. 우기가 감도는 날이면 베어놓은 나락이 비에 젖을세라 꼭두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집과 논을 오갔다. 멀리서 보면,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나락볏가리가 공중에 뜬 채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골짜기에 있는 외딴집이다 보니, 밤마다 빨갱이들이 와서 괴롭혔다. 자칫 자식에게 해를 입힐까봐 아버지는 집을 버리고 큰 마을로 이사하였다. 그리하여 애써 개간한 논과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산모퉁이 몇 개를 돌고 개울을 두 개나 건너야 논에 닿을 수 있었다. 가는 길은 오르막이라서 숨이 턱에 닿아 입에서 단내가 났고, 오는 길은 내리막이라서 산짐승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후르르 뛰어 내려왔다. 빈 몸으로 다니기에도 힘든 길이었다. 그런 길에서 나락을 지고 후들후들 다리를 떨던 아버지가 잠시 쉴 때는 지게가 넘어지지 않도록 작대기로 받쳐 놓았다.

  아버지는 분답잖게 봄비가 오는 날이면 창고 앞에서 지게 만들기에 열중했다. 끌과 자귀로 뚝딱뚝딱 나무를 다듬는 소리가 늦잠 자는 내게 자장가처럼 들렸다. 지겟가지 두 개를 바로 세워 놓고 중앙에 세장을 붙여 몸체를 맞댔다. 정으로 지게 목발에 구멍을 뚫은 다음, 짚을 물에 축여 꼽꼽해지면 나무망치로 토닥토닥 두드려 등석을 엮어 붙였다. 어깨에 메는 미끈은 긴 머리를 땋듯 정성스레 땋아 지게에 달았다.

  지게를 손보고 나면 아버지는 지겟작대기를 만들었다. 위쪽이 가위처럼 벌어진 나무를 골라 아버지의 키에 맞게 잘랐다. 겉을 매끈하게 다듬은 다음 송곳처럼 뾰족한 쇠를 끝 부분에 박았다. 아버지는 빈 지게를 진 채 작대기로 땅을 몇 번 짚어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작대기 끝에는 쇠가 들어가도록 둥글게 말아놓은 놀구멍이 없다. 슴베가 잘 들어가게 하는 괴구멍도 파지 않는다. 작대기 끝에 쇠를 박으면 그것이 물미장이다. 호미나 낫에는 힘을 받도록 테두리를 감싸주는 신쇠가 있지만 물미장에는 아무런 치장도 없다. 오직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묵묵하게 삶을 지탱하는 내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농사일밖에 몰랐다. 땀에 젖은 베적삼에 논 갈고 밭을 갈았다. 동이 트면 아침이 되고 해가 지면 밤이 오듯, 자고새고 하는 일이 지겹지도 않은지 우직하게 일만 하였다. 밤이면 끙끙 앓아도 날이 밝으면 들로 나가는 일벌레가 따로 없었다. 오직 땅만 아는 샌님처럼 땅 한 뙈기 늘이는 일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았다. 그런 아버지는 일을 놓으면 밥숟가락을 놓는 것과 같다고 여기셨는지도 모른다.

  무거운 짐을 지고 일어날 때 작대기는 요긴했다. 촉이 땅에 쏙 들어가라고 아버지는 작대기에 힘주어 꽂았다. 그런 다음 한 손으로 작대기를 짚고 한 손으로는 지게 목발을 잡고 무릎을 천천히 세웠다. 비탈진 길에서는 작대기로 지탱하며 한 발 두 발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발이 부르트고 다리가 아파도 묵묵히 버틴 아버지에게 지게와 작대기는 한 몸이었다.

  아버지는 새벽이슬을 맞으며 길도 아닌 비탈 섶을 넘나들었다. 촉이 박힌 작대기로 땅을 짚으며 산속의 적요를 발걸음으로 사각사각 깨워가던 길. 아버지의 발바닥에 굳은살을 덧대게 한 그 길엔 이제 울울창창 숲이 우거져 있으리라. 산골짜기 하나를 길게 차지했던 논은 주인의 부재를 알까. 여름이면 어김없이 하얀 벼꽃을 피우는지 궁금하다.

  가끔 작대기가 사립 안에 있으면, 우리 형제들은 그것으로 마당에 금을 그었다. 반대차기나 땅따먹기를 할 때 몸을 구부리지 않고 금을 그을 수 있었다. 물미장으로 그은 금은 밟아도 여간해서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뒷밭에 독사라도 나오면, 화들짝 놀란 어머니는 김을 매다가도 촉이 박힌 작대기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창처럼 뾰족한 물미장에게 죽임을 당한 독사는 개울가에 있는 가시나무에 연 꼬리처럼 걸리기도 했다.

  삶을 배우는 데 일생이 걸리고, 죽음을 배우는 데도 그만큼 걸린다고 한다. 사람은 늙어야 사방이 보인다는 성인의 말이 있듯,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나서야 아버지를 여러 면에서 볼 수 있었다. 노부모의 장남이었으며,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여러 식솔을 거느린 가장이었다. 마을에서는 척박한 땅을 억척같이 일궈 옥토로 바꾼 농사꾼이었다. 아버지가 벼슬이 높아 권세를 내세우며 거드름을 피웠다면, 오늘 이처럼 애틋하게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아버지이기 전에 평범한 남자였다. 누구에게나 청춘은 소낙비 지나가듯 가버리는 것이고 보면, 아무리 바동거려도 살림에 주름이 펴지지 않으면 다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 않았겠는가.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었을 것이며, 친구들이 요사스런 자리에서 장단에 맞춰 가무를 즐길 때면 왜 휩싸이고 싶지 않았으랴. 약주를 좋아하는 옆집 아저씨처럼 취생몽사로 적당히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삼불주의 三不主義를 지켰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서 어떠한 일도 뿌리쳤을 것이다.

  철부지 때는 지게를 지고 다니는 아버지를 보고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 내 삶에 있어 이러한 기억의 화첩은 비밀의 유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살면서 힘든 일에 부닥쳐도 옛 그림을 떠올리며 거뜬히 견뎌낼 수 있었다.

  물미장을 가만히 바라본다. 연필심 같은 촉으로 기억을 다시 쓴다. 아득한 풍경이 연막처럼 퍼지다가 복통처럼 가슴을 내리누른다. 아버지의 삶이 납덩이같이 머릿속에 남아 무거운 공기를 타고 서서히 퍼진다. 평평한 일상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벼랑에서 피운 삶. 비탈길을 오르고 아찔한 낭떠러지 옆을 조심스레 걸어온 아버지의 삶이 전시관 유리 안에 박제 되어 있다.

  오늘 아버지의 삶을 다시 읽는다. 그 시절의 화첩을 몇 장 넘기다가 덮는데, 마음의 골짜기에서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꾸다 만 꿈처럼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아버지의 고무신/이미숙(경남일보)

꽃을 그린다. 하얀 고무신에 정성을 들여 다섯 개의 빨간 꽃잎과 중앙에 노란 수술도 그려 넣는다. 붓 끝에서 작은 꽃밭이 생겨났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꽃신이 될 것 같다. 색감은 깔끔하지만 조금 밋밋한 느낌이다. 파란색과 노란색의 물감을 섞어 초록색 잎을 피워놓으니 바람이라도 살랑대며 불어올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비천상(飛天像)이라도 그려보고 싶지만, 붓끝은 그런 마음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단장을 마친 꽃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할 것인지, 아니면 장식용으로 두어야 할 것인지 망설여진다. 때가 묻어서 씻게 된다면 애써 그려 넣은 꽃물이 빠지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앞서기도 한다. 가진 만큼 걱정도 많아진다고 하더니, 산란한 마음이 저울질을 한다.

어린 시절 일터에서 돌아오신 아버지의 고무신을 씻는 것을 좋아했다. 기둥을 받쳐주는 주춧돌에 세워 말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때로는 깨끗이 씻지 않고 말리게 되면 신발 뒤축에 고인 구정물이 내 손끝을 나무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다시 볏짚을 접어서 수세미를 만들었다. 거기에 검지도 누렇지도 않은 거무칙칙한 색의 빨랫비누를 묻힌 뒤 힘주어 빡빡 밀어주면 고무물때가 빠져 나왔다. 다시 한 번 그렇게 씻으면 빨래판 돌은 하얀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았다. 내 작은 손으로 고무신을 씻은 후, 한 바가지의 물을 부으면 시원한 물로 땀을 훔친 아버지의 얼굴처럼 말쑥한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평소 외출할 때가 아니면 고무신을 신었다. 잿빛 하늘이 여명에 물들기 전부터 5촉짜리 전구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새끼줄을 꼬며 기도하셨다. 새끼틀은 가릉 가릉 힘든 소리를 내며 나의 새벽잠과 뒤섞여 귓전에 맴돌았다. 고무신은 늘 아버지의 발바닥에 착 달라붙어 따라다녔다. 밭 언덕을 의지해서 소꼴을 벨 때에도, 아침 일찍 이슬 젖은 논둑으로 물꼬를 보러 갈 때도 함께했다. 이른 새벽부터 어스름 어둠이 내릴 때까지 하루의 일과를 고스란히 같이 보냈다. 가끔 장화를 신을 때도 있었지만 고무신은 촌부의 고된 삶의 무게를 끈끈하게 견뎌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점심 식후에는 오수의 달콤한 시간을 즐겼다. 그 사이 나는 반나절을 따라다니며 지쳐 몰골이 되어 돌아온 고무신을 씻었다. 마치 나에게 부여된 임무처럼 행했다.

오래 신어 볼품이 없어진 신발은 보통 발꿈치 뒤쪽 연결 부분부터 터졌다. 그리고 앞쪽 발가락 닿는 부분 순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신고 나면 거칠고 힘들었던 삶을 말해 주듯이 신발 전체에 작은 금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그렇게 오래 신어 낡아버린 고무신은 씻어도 새것처럼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새 볏짚수세미로 밀고 또 밀어도 하얀 물때가 나오지 않았다. 이는 금 사이사이마다 이미 고무 성분은 빠지고 때가 물들어 버린 탓이었다.

흰 고무신에 꽃그림을 그려 넣고 보니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그래서인지 가끔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멋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가슴 한 구석이 아려 오기도 한다.

꽃으로 단장한 고무신을 신어본다. 오른발을 내딛는다. 발끝에서 말랑한 고무재질의 느낌이 전해져 온다. 왼발도 조심스럽게 내디뎌본다. 무거웠던 마음도 날아오를 듯하고 발은 한결 가벼워진다. 어린 시절, 봄이면 겹겹이 걸쳐 입었던 두터운 겨울옷을 벗고 가볍게 봄옷으로 단장했을 때처럼 기분이 가뿐하다.

꽃 장식으로 단장한 고무신을 신고 산책길로 향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비음산을 등지고 있다. 몇 발짝 걷다 보면 산을 오르는 초입에 들어선다. 산사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산길을 올라 갈 것인지 그냥 돌아설 것인지 잠시 망설여진다. 새 고무신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험하지 않는 둘레길을 택한다. 정적을 깨우는 종소리는 덩그렁~ 하고 크고 무겁게 깊은 여운을 드리우며 산길에 잦아든다. 내딛는 발자국마다 흙의 감촉이 있는 그대로 전해진다. 작은 돌들이 둥글고 뾰족하게 누워 있거나 기다란 나뭇가지가 발아래서 미끄러지듯 밟히면 짜릿한 전율이 다리를 지나 온몸으로 퍼져온다. 가끔은 간지럽기도 하고 때로는 허방을 짚어 넘어지기도 한다. 솔밭 오솔길을 따라 한 바퀴 더 돌아볼까 하고 망설이다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나무의자에 걸터앉는다. 한 시간도 채 걷지 않았는데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온종일 고무신을 신고 다녔던 아버지의 발은 아픔을 넘어 감각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무디어지지 않았을까.

철없이 밤이 이슥하도록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집으로 돌아온 나는 부모님께 야단을 맞을까봐 눈치를 보며 대문 앞에서 한쪽 신발을 힘껏 벗어 던졌다. 신발이 바로 놓이면 안심이 되었고, 거꾸로 엎어지면 어김없이 야단을 맞았다. 하지만 마당에서 등짐을 지고 밤하늘을 살피시던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시며 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무신은 땅의 기운과 함께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우리들만의 주술까지 떠오르게 한다. 값비싼 구두나 운동화 같은 다른 신발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교감이다. 추억은 늘 가슴속 깊은 곳에 어려 있나 보다.

제 이름의 몫을 다한 초라해진 고무신을 미련 없이 버렸듯이 이승과의 인연이 다한 날, 곰삭은 육신을 벗어버리고 당신도 떠나갔다. 받아만 왔던 부성애다. 이제 내가 예()를 다하려 하니 당신은 이미 내 곁에 없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인연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우리의 삶속에 만나는 모든 인연들의 아픔을 말하지 않아도 안아 줄 수 있고 힘이 될 수 있다면 외로움은 반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나 또한 그렇게 위로받고 싶기 때문이다.

이제 흑백사진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아버지다. 꽉 다문 입술과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이다. 침묵으로 일관하신 당신, 심연에 감추어둔 사랑을 하나둘 더듬어본다. 무심하게 보내버린 세월은 이십 년을 넘어서고 있다. 살아생전 한 켤레의 신발도 사 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애달픈 그리움만 간절하다.

하얀 고무신 한 켤레를 영전에 올린다. 수를 놓은 앞쪽의 넓은 부분에 내 마음이 듬뿍 물들어 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곱게 단장한 새 꽃신을 신은 아버지는 길을 나서며 채비를 서두를 것이다. 꽃신에 담긴 당신의 영혼이 마치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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