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여유/재미있는 시 모음

정말 / 이 정 록

취송(翠松) 2022. 3. 2. 19:37

정말 / 이 정 록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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