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생선비늘*/5부 팔공산

팔공산

취송(翠松) 2022. 3. 5. 09:28

팔공산

팔공산 능선 길을 걷는다. 높은 하늘은 청명하고 옷깃으로 스며드는 가을바람이 상쾌하다. 나는 등산을 할 때마다 산길이 인생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련한 기억 속의 일이다.

늘 다녀 익숙한 팔공산에서 길을 잃어 헤맨 적이 있었다. 회사 직원 몇이 어울려 파계재로 올라 능선 따라 동봉까지 가서 하산하기로 했다. 계절은 겨울의 초입이지만 산속의 감나무에는 알알이 매달린 홍시가 속살을 파고드는 서리를 견디어내며 가을을 붙들고 있었다. 북쪽의 나무들은 월동준비가 끝난 듯 잎 떠나보내고 조용한 침묵에 잠겼고, 남쪽의 나무들은 양지바른 곳에 앉아 노는 아이들처럼 속살거리고 있었다.

파계재부터 동봉까지는 완만하게 오르는 능선 길이다. 사방이 확 트인 능선 길의 시원함이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하여 여유를 부리다 늦은 점심이 되었다. 수시로 변하는 게 산 날씨라 했던가. 별안간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으로 바뀌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온통 하얀 눈이 분분했다. 산 위에서 맞는 첫눈이라니! 이것은 하늘이 축복하는 서설인 듯싶었다. 아직 눈 내릴 시기가 아닌데 팔공산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함박눈을 맞으며 두 팔 벌려 환호했다.

그러나 즐거움이 깨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탐색전도 없이 마구 주먹을 휘둘러대는 권투선수 모양, 눈은 폭설로 바뀌어 세차게 퍼부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내리는 눈은 밥 먹는 것조차 힘들게 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짐을 꾸려 출발했다. 어느새 발목까지 찬 눈이 발걸음을 붙잡고, 쏟아지는 눈이 시야를 가려 멀리 볼 수가 없었다. 산의 정상도 보이지 않고 시계는 좁아졌다.

길을 잃는 것은 순간이었다. 팔공산맥은 동서 방향으로만 뻗어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길만 따라 걸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이 낯설다는 느낌이 왔다. 어느 지점에서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마음이 바빠졌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되돌아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점심을 먹던 장소가 다시 나타났다. 당황하여 바로 뒤돌아 전진했다. 또 그 길이 나타났다. 그렇게 같은 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는 사이 눈이 멎었다. 하지만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온 산이 하얗게 빛났지만, 정상이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눈밭에 서 있으려니 사막에서 길 잃고 서있는 나그네 신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조난하는구나 싶은 공포감이 엄습했다.

우리는 잠시 어쩌지 못하고 망설였다. 하지만 눈 덮인 산에서 서성거리는 건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이제는 어느 쪽이든 하산 길이 보이면 내려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방향만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잡으면 된다. 길은 대부분 대구 방향인 남쪽으로 나 있기도 하다.

산악 사고의 대부분은 하산 길에서 일어난다. 아이젠 없이 미끄러운 눈 위를 걷기는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길이 아닌 곳으로 잘 못 가면 벼랑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올 수도 있는 위험한 하산이었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저 멀리서 희망같이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길 잃은 나무꾼이 어느 계곡에서 오막살이 집 한 채를 만난 기분이 이럴까. 우리는 반가움에 큰 소리로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그들은 바윗골이라 대답했다. 제대로 내려왔음에 안도하면서도 가슴이 철렁했다. 바윗골은 암벽타기 하는 바위 절벽이 아닌가. 길은 절벽 바로 옆으로 나 있어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다.

인생길도 그렇지 않은가. 사방이 확 트인 능선 길을 여유롭게 걷듯 편안한 인생길도 있을 것이요, 산 위에서 생각지도 않게 첫눈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을 것이다. 또 행복한 환호가 재앙처럼 내 삶을 덮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산에서 맞는 첫눈처럼 즐거워하다가 길을 잃고 헤매듯 그런 난관을 헤치며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길이 아니겠는가. 길을 잃기도 하고 어둡고 험한 길을 만나기도 한다.

나는 풍족한 삶은 아니더라도 매달 받는 봉급으로 아내와 아이들과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다. 느닷없이 외환위기가 폭풍우처럼 나라를 덮쳤다. 나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명예퇴직의 대열에 동참했다.

사직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어느 검사장의 폭탄주 발언이 있었다. 검사장은 대낮에 폭탄주를 마시고 기자들한테 노조파괴 작업을 했노라고 자랑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파업 유도 사건이었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렸다. 우리 퇴직자들은 잘 못 잡은 길을 되돌릴 기회로 생각했다. 퇴직 무효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특검까지 갔으나 결국 파업 유도는 없었다는 무혐의로 사건은 종료되었고 우리의 소송도 패소로 끝났다. 우리는 회사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팔공산은 집의 앞마당처럼 쉽게 다니던 산이다. 생각지 않게 늘 다니던 익숙한 곳에서 길을 잃어 고생했었다. 그래도 끝내 잘못된 길을 되돌아 나왔고 어렵사리 하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생길은 일방통행이다. 비껴가는 길은 있을지 몰라도 되돌아 나오는 길은 없다. 잘못 들어선 인생길은 쉽게 되돌릴 수 없었다.

능선의 평탄한 길을 걸으니 편하기는 한데 지루한 느낌도 든다. 산길은 아무래도 산길다워야 제맛이다. 구절양장의 좁을 길도 걷고, 위태위태하게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 뛰어보기도 하고, 안돌이 지돌이로 울퉁불퉁한 바윗길을 지나야 제대로 등산의 맛을 느끼는 게 아닌가 말이다.

다 지나간 옛일이다. 지금 나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인생길은 마치 산길 같다고 생각하면서 팔공산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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