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금상 운문사 규화목
운문사 규화목 / 박순태
운문사에 가면 두 그루의 나무를 만나게 된다. 한 그루는 오백여 년을 하루같이 보낸 축 처진 소나무이고, 다른 한 그루는 남중해 파도를 헤치며 인도네시아에서 건너온 화석나무다. 운문사 소나무는 잘 알려져 있지만 화석나무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두 그루 나무를 지켜보니 어디선가 비슷한 한 쌍을 보았다는 기억이 난다.불국사 경내에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비구니 도량에 와서 그럴까, 이색적인 모양과 무늬 때문에 그럴까. 운문사 소나무보다 자그마한 체구에 나뭇결무늬로 온몸을 감싸 안은 화석나무에 스르르 마음이 기운다.
나무에 피돌기가 시작된다. 선명한 나뭇결이 꿈틀대는 실핏줄처럼 생동감을 주면서 은은한 빛을 발한다.나무일까 돌일까를 분간하기 어렵다. 눈은 나무라 하고 머리는 돌이라 한다. 머리가 나무라고 번복을 하니 이번에는 눈이 돌이라 고쳐 말한다.내력이 씌어진 표지판 글자가 흐물흐물할 때까지 나무의 정체를 씹고 또 씹어본다.가지고 온 잡다한 생각들은 미련 없이 버리고 상상을 초월한 결정체에 의문에 의문의 샘을 판다. 풍기는 모습만큼 생각의 샘을 깊이 파야 할 판이다.
겉모습이 그지없이 단단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성정 또한 얼음장 같아 찬바람이 쌩쌩 불어올 듯하다.마음을 다잡고 다가서서 은근슬쩍 손으로 만져본다.강해 보여도 부드럽고 여유로우며 다정다감한 맛이 전해진다.내면을 파고드니 외형을 해탈한 자비가 풍겨온다. 나무꾼이 톱질하지 못한 채 돌아서도 온기를 채워 줄 만큼 신통력이 있음직하다.
석탑은 절 경내에 심겨진 나무다. 중생들과 스님들의 불심을 먹으며 자란다. 그렇다면 경내의 나무는 목탑이다. 나무도 스님이 두드리는 목탁소리와 신도들의 불경소리를 듣고 자란다.운문사의 처진 소나무가 대중들의 불심을 담은 석가탑이라면, 규화목은 스님의 불심을 담아내는 다보탑을 닮았다. 연상되는 다른 게 있다. 소나무가 우람한 체격에 가사장삼 날리는 비구승이라면, 규화목은 해맑은 얼굴에 청아한 독경소리 내는 비구니 같다.
어찌하여 죽은 나무가 흙으로 썩지 않고 돌이 되었을까. 모든 생물은 명이 다하면 미생물과 박테리아가 활동해서 분해되어 없어지는 게 진리가 아닌가. 그래서 더더욱 의아스럽다. 자연현상에도 예외가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빨리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야겠다.
규화목의 생성과정은 이렇게 엮어진다. 숨이 멎는 순간 지체 없이 흙 속에 묻혀 나무 성분은 다 없어진다.그때를 틈타 지하에 용해되어 있던 광물질이 침전작용을 일으켜 조직 사이를 파고든다. 나무 자체의 구조, 조직, 나이테 등이 고스란히 남아 화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나무는 몸통의 살점을 미련 없이 버렸기에 물에 녹아 있던 광물질로 빈자리를 채울 수 있었으리라. 규화목은 제 흔적 남기기를 무척 바랐나 보다. 사람은 생전에 모진 노력의 시련을 감내해야 사후에 이름을 남긴다면, 나무는 숨 떨어지는 순간에 홍역을 치르면서 형체를 보존하게 되었으니 규화목의 탄생이 의미심장해진다. 이것은 돈, 명예, 권력 같은 욕망들을 뿌리치고 오직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감을 얻는 출가승의 고행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보니 그들의 삶이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답이 나온다.절대 행복을 추구하는 정진수행 끝에 찾아드는 완결이 출가승의 깨달음이라면, 고진감래 끝에 얻어진 결정체가 환생한 돌인 규화목이 아닐까 싶다.
볼수록 나무 화석이 친근감을 보내온다. 자체의 형질은 버리면서 다시 태어나서 그런지, 넓은 도량에서 수양한 자세로 다가온다. 묵언수행이고 부동정진이다. 산전수전 겪으면서 지혜로 다져진 성인 같기도 하다.나무도 수행정진을 오래도록 하다 보면 득도에 이르나 보다.
아이들 손을 잡은 여인들이 규화목 앞에서 반달을 그리며 서 있다.얼굴색이 다르고 말을 떠듬거린다. 그들은 규화목을 어루만지며 그리운 사람을 만난 듯 마음에 묻어둔 사연을 풀어내느라 떠날 줄 모른다. 말을 들어보니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부인네들이다.딸과 엄마가 만난 만큼 다정다감해 보인다. 한쪽은 반가워 어쩔 줄 모르며 사연을 풀어내고, 상대는 두 눈을 내리깔고 딸의 사연을 들어주는 듯하다. 다문화 모녀의 원조가 이곳에 있었구나 싶다.
생각을 굴리면서 발길은 대웅보전으로 향한다. 비구니 한 분이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규화목이 환영되어 살아난다. 꼼짝 않는 스님이 규화목이고 경내의 규화목이 비구니이다.규화목이 절집 문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중생을 인도한다는 생각이 든다.무언으로 전해지는 설법에서 내 삶의 과거를 이끌어낸다.
걸핏하면 말이나 행동에 뿔이 났었다. 강철 같았지만 순간적으로 물렁물렁해졌고, 혈기왕성했지만 가냘프고 감상적이었다.뒤지지 않으려고 사회 속에서 북적 비벼댔지만 외로움은 깊어졌다.합리적 이성을 추구했지만 순간순간 비합리적인 목소리를 높였다.치밀한 분석에 열을 올리다가도 맹목적 믿음에 호소도 했다.삶의 찌든 때가 묻어날수록 매사에 무디어져만 갔다.그 무딤은 아둔함이나 무감각만은 아니었다. 뾰족뾰족했을 적엔 시야가 좁고 생각이 얕았다면, 무딤은 더 넓게 바라보고 더 깊게 생각한 데서 생겨난 슬기라 여겨진다. ‘늙음은 젊음의 상실이 아니요 젊음의 완성일지다’라는 말처럼, 무디게 하는 것은 자연의 작용이자 비움을 채워 나가는 묘책일 성싶다. 돌나무가 이루어낸 신비로움을 내 삶에 대입시키면서 오늘만큼은 작은 탑이 되어 서 있고 싶다.
운문사 규화목이 알몸으로 전하는 화두는 이렇게 요약되는 것 같다.가장 큰 것은 밖이 없고, 가장 작은 것은 안이 없다.이 구절은 노자의 사상이자 불경이 아닌가. 그러면서 나무의 혼으로 여겨진다.내 마음의 눈에 횃불이 켜진다.
마음속에 부처 한 분 조용히 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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