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수필모음/경북문화체험

술잔에 실린 비밀

취송(翠松) 2022. 3. 10. 09:20

2015 경북문화체험 은상(6)

 

술잔에 실린 비밀/김장배

 

하얀 벚꽃거리가 눈부시다. 외국인들까지 포석정의 봄을 느낀다. 화사한 바람이 계곡을 따라 흐르다가 길손의 몸을 휘감고 돈다. 골짜기를 가득 메운 소나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들은 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벚꽃은 만개했지만 포석정지는 왠지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옛 영화가 사라진 빈터에는 참새가 날아들어 입방아를 쪼아댄다. 오랜 세월 동안 여울물에 씻겨 조각은 부드럽게 다듬어졌지만, 거무스름한 모습을 보니 찬란한 역사도 침묵에 들면 쇠락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사람도, 건물도 역사 속으로 떠났기에 남아 있는 돌만이 옛일을 기억할 것이다. 때로는 가슴 아린 사연을 품고 혼자 묵묵히 참아 왔으리라. 포석정이 신라가 망하게 된 치욕의 장소로 알려진 것은 고려 시대의 역사서 삼국사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견훤이 후궁에 숨어 있던 경애왕을 붙잡아 자결케 하고 왕비를 겁탈했으며, 부하들은 경애왕의 비첩들을 농락하고 재물을 노략질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신라가 편찬한 역사서가 아니라 제3자인 고려의 기록이라서 그런지 의문점이 남는다.

 

또 다른 의문이 있다. 포석정은 일제강점기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하필이면 침략자에 의해 보수되는 과정에서 물이 들어오는 입수부와 나가는 배수부가 훼손된 채 사적 1호로 지정되어, 어딘가 석연치 않다. 일제는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우민화 정책을 폈다. 역사까지 비하하면서 너희는 아래서 망할 민족이다는 인식을 심으려 했으리라.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러한 일제의 음모를 정당화하는데 좋은 자료가 아니었을까. 그 후 1998년 포석정 인근에 모형전시관을 조성하기 위해 실제 조사를 진행했다. 그때 발굴에 많은 유물이 발견되면서 이곳에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음이 알려졌다. 제사에 사용된 그릇도 출토되어 포석정이 왕과 귀족들이 모여 중요한 일을 논의했거나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기도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마침 咆石이라는 글자가 뚜렷이 새겨진 명문기와 한 점이 수습되어 학자들에게 해석의 실마리를 주었다.

 

화랑세기에 나타나는 포석사(鮑石祠), 한 학자는 포석사는 신주를 모시는 사당 또는 묘라고 한다. 이 포석사에 삼한을 통합한 후 사기士氣의 종주로 받들어진 문노文弩의 초상화를 모셨다. 문노와 그 부인이 된 윤공이 결혼했고,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생인 문희가 혼인식을 치른 곳도 포석사였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포석정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나아가 귀족들의 혼례를 거행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임을 추정할 수 있다.

 

다른 학자는 포석정을 정원 유적이라고 본다. 맑은 냇물에 일 년 동안 몸에 밴 부정을 씻고 제사를 지낸 다음, 음식과 술을 먹던 시설이라고 해석한다. 흥을 돋우기 위해 잔을 물에 띄워 보내 마셨고. 그 과정에서 즉흥시를 짓던 행사가 유상곡수연의 형태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유상곡수연의 운류는 중국에 있다. 당시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를 비롯한 명사들이 저장성 후이치산에 있는 난정蘭亭이란 정자에 모였다. 그곳에서 개울물에 몸을 깨끗이 한 다음, 모임의 뜻을 하늘에 알리는 의식을 행했다. 그러고는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기 앞에 올 때 시를 읊었다. 이것이 시발이 되어 왕궁에 유배거를 만들었다고 한다. 신라의 포석정은 그것에 착안해 독특하게 창조한 시설이라고 본다.

 

이러한 석구는 중국 동진 시대부터 있었다. 대개 자연의 산수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그에 비하여 포석정은 인공적이다. 예순세 조각의 화강암을 일일이 다듬어 전복껍데기 둘레처럼 수로를 만들었다. 곡선을 따라 물을 흘려보내면 느리게 흐르거나 달팽이 모양으로 빙글빙글 도는 현상을 보이고, 특히 잔이 멈추는 곳이 열두 군데라고 한다. 오늘날까지 유상곡수연의 자취가 이처럼 잘 남아 있는 곳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역사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포석정이 망국의 놀이터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비판을 받는 이유다, 견훤이 경주 인근까지 쳐들어오는 바람에 경애왕이 왕건에게 급히 원군을 청한 때가 음력 9월이었다. 게다가 연회가 열린 음력 11월은 날씨가 찰 텐데,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황에 추위를 무릅쓰고 노천에서 술판을 벌였을까. 이는 전후 사정으로 보아 설득력이 떨어진다. 신라의 왕가는 국가의 안위를 위한 제사를 지내다가 참변을 당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역사를 서술하는 주체는 주로 승자의 몫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시대에 씌어졌다. 고려 왕조가 신라가 망한 이유를 찾다 보니 신라의 귀족과 왕가의 무능에 초점이 맞춰졌으리라. 거기다 구전되는 이야기를 그대로 서술하여 망국의 장소로 기록한 것은 아닐까. 훗날 일본이 우리 민족의 문화적 수준을 비하할 자료를 찾아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삼국사기의 기록을 이용했다면 그 또한 씁쓸한 일이다.

 

패자의 역사는 대부분 묻혔다. 승자의 입장과 패자의 입장을 대등하고 놓고 바라볼 때 실체에 한 발짝이라도 더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류가 있다면 치밀한 고증을 통해 바로 잡았으면 좋겠다. 되도록 신라인의 지혜와 수준 높은 문화의식이 깃든 장소로 알려져 많은 사람이 유상곡수연의 향기를 즐긴다면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오니, 한 여류화가가 포석정을 스케치북에 담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느티나무는 당당히 줄기를 세우며 싱싱한 푸른 잎을 내밀었고 포석에는 물줄기가 유유히 흘렀다. 홍콩에서 왔다는 그녀는 우리 문화에 대한 대단한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신라가 이방인의 스케치북 속에서 당당히 재현되는 것 같았다.

 

수수로운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린다. 제사를 지내는 모습과 술판을 벌이는 모습이 머릿속에 교차한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신라는 사라졌고 돌은 말이 없다. 하지만 신라인의 지혜와 숨결은 언제까지나 포석정의 물길 따라 한 편의 고전으로 영원히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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