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생선비늘*/5부 팔공산

고진감래길

취송(翠松) 2022. 3. 24. 09:05

고진감래길

왕건 8길 중 다섯 번째 길은 고진감래길이다. 백안 삼거리에서 평광동 버스 종점까지 약 5.28 .

백안 삼거리에서 왕건길로 접어든다. 며칠간 계속된 불볕더위로 인한 열기가 아직도 식지 않았다. 호젓하게 서 있는 육각정의 백안 쉼터도 더위에 늘어져 그늘막 노릇은커녕 땀을 쥐어짤 듯하다. 무심히 그냥 지나쳐 바로 왕건길로 들어선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니 바로 키 큰 나무들이 그늘을 선사한다. 처음부터 오름길이다. 숨이 턱턱 목까지 차오를 즈음에야 평지길이 나타난다. 조금 숨을 돌리며 걸을만하다 했는데 다시 오름길이다. 이렇듯 산길은 늘 오름과 내림을 반복한다. 고진감래의 기쁨을 누리려면 이 정도의 더위와 이 정도의 헐떡임은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오름길을 다 올랐다는 뜻일까, 깔딱재란 표지판이 보인다. 숨이 깔딱 넘어갈 만큼 힘들게 올라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게 아닌가 싶다. 쉬지 않고 가는 길을 재촉한다. 다행히도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은 나뭇잎에 씻기어 그늘로 내려온다. 그래도 습도 높은 기온에 온몸이 땀투성이가 된다. 젊었을 때는 이 정도의 산을 오르는 것을 등산이라 말하지도 않았는데 몸으로 세월을 느끼겠다. 역시 나이는 어쩔 수 없나 보다. 한참을 걸은 후에야 산등성이에 올라섰다. 한 줄기 바람이 이마의 땀을 씻어준다. 목덜미로 스며드는 바람결이 달콤하다. 물 한 모금 마신다. 청량함이 온몸을 휘감아 돈다. 힘들게 벼랑길을 올라온 덕분에 느낄 수 있는 달콤함이 아니겠는가. 역시 고()는 감()의 필요조건인가보다. 고통 없이 어찌 달콤함을 기대하겠는가.

힘든 길은 생각만큼 길지는 않다. 한 시간여 걸었을까. 돼지코란 표지가 있다. 이름만 있을 뿐 상징하는 아무것도 찾을 수는 없다. 방향을 우측으로 살짝 틀면 목적지로 가는 길이다. 잠시 능선 위로 올라 시원한 산바람을 맞는다. 산 위의 청량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씻은 듯 날려 보낸다. 땀 뻘뻘 흘리며 힘들게 올라와서 맛보는 바람의 맛이라니. 어찌 메마른 도로를 걸으며 맞는 바람하고 같으리오. 산 위에서 맞는 바람의 상쾌함 때문에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산에 오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모양이다.

돼지코부터는 내리막길이다. 힘들게 올라와서일까, 내려가는 길이 날아갈 듯 가볍다. 천년세월에 바위 부서진 모랫길이 미끄럽다. 한참을 내려오니 작은 연못 평광지가 보인다. 길은 평광지를 돌아 세 갈래 길이다. 평광 종점으로 가는 길과 신숭겸 장군 유허비인 모영재로 가는 길이다. 모영재는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갈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모영재로 발걸음을 돌린다. 모영재 가는 길은 계속 오름 길이다.

모영재는 고려 개국공신인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로 매년 음력 99일에는 평산 신씨 문중에서 합동으로 향사를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뒤편에는 후손인 신정위가 신숭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영각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왕건길의 첫걸음을 신숭겸 장군 유적지에서 시작했는데 또 유허비인 모영재가 있다. 왕건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숭겸 장군의 거룩한 뜻을 기리는 마음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모영재 가는 길엔 사과 과수원이 많이 보인다. 9월 초순인데 벌써 붉게 익은 사과를 수확하고 있다. 사과 이름을 물어보니 홍로라고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추석 상에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모양이다. 여기저기 과수원엔 다른 사과들도 햇볕에 영글어 가고 있다. 대구에서 익어가고 있는 사과를 본다는 것은 대구의 자존심을 보는 듯 느껍다.

40여 년 전, 내가 대구에 처음 올 때만 해도 대구는 유명한 사과 산지였다. 명절이 되어 고향에 갈 때면 산지에서 직접 구한 것이라며 대구 사과를 낑낑거리며 들고 가곤 했다. 과수원에서 익어가는 사과를 보며 역시 사과는 대구라며 감탄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구에서 서서히 사과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기온의 상승으로 대구는 이미 사과 재배의 적지가 아니다. 사과는 더 북쪽으로 올라가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니 여기 평광에서 대구 사과를 볼 수 있다는 게 어찌 기쁘고 감개무량하지 않으랴.

대구 평광동에는 1917년에 처음 사과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대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홍옥 사과도 현재 이곳에 살아있다. 이 나무는 1935년에 평광동 우채정 씨의 선친이 심은 5년생 홍옥과 국광 등 100여 그루 중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보통 사과나무는 30~40년 과실을 맺으며, 그보다 수령이 오래되면 과실로서는 수명이 다한 것으로 본다. 그렇게 보면 80년이 넘은 평광동의 홍옥 사과가 아직 열매를 맺고 있는 게 기이하다. 여전히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홍옥 사과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고 하니 평광동은 사과재배에 특별한 곳인가 보다. 2009년에 보호수로 지정된 홍옥 사과나무는 유전자원으로서 그 가치가 큰 매우 귀중한 나무라 한다.

땀 뻘뻘 흘리며 산을 넘을 때는 걸음걸음이 고통인 듯싶더니, 지금 이곳에서 영글어가는 사과를 보는 기쁨은 지금껏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이 또한 고진감래가 아닐까. 모영재를 출발하여 다시 평광지로 되돌아와서 평광 종점을 향해 걷는다. 계곡 같은 길 양쪽으로는 작은 대나무 숲이 있어 잎 비비며 내는 소리가 청량하다. 얼마 걷지 않아 평광 버스 종점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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