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생선비늘*/4부 객기

객기(客氣)

취송(翠松) 2022. 3. 5. 09:29

객기(客氣)

날씨가 변덕이다. 입동이 지났는데도 그동안 따뜻한 가을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 한파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방송의 일기예보에서는 내일은 더 춥다고 하니 얼마나 움츠러들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아파트 담장엔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으니 말이다. 개나리가 따뜻한 날씨에 그만 잠시 계절을 착각했을까. 아니면 추위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란 자만감에 객기라도 부린 것일까. 몸 움츠리고 두런거리는 개나리가 애잔해 보인다.

십여 년 전, 그해의 마지막 달이었다. 회사는 구조조정의 회오리에 함몰되어 있었다. 회사를 통폐합하는 작업이기에 구조조정의 폭은 컸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노동조합은 통폐합 반대 투쟁으로 날을 샜다. 여기저기 붉은 깃발은 찢어진 채 힘없이 널브러져 바람에 나부꼈다. 운동장은 함락된 성()같이 을씨년스러웠다. 타협 없는 싸움은 계속되었고 직원들은 지쳐갔다.

이미 그동안에 두 번의 대규모 명예퇴직이 있었다. 많은 동료가 이참에 다른 일을 해볼 것이라며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나갔다. 용감하게 회사를 그만두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때마다 명예퇴직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심한 갈등을 겪고는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꾹 눌러 참고 견디는 중이었다.

회사는 공기업이라 정부에서 구조조정의 지침 안을 제시했다. 정부에서 제시한 기간은 아직 몇 년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사장은 구조조정을 당기라는 특명이라도 받고 온 듯이 정부 안보다 먼저 구조조정을 완료하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 한 번만 더하면 정부에서 하달한 구조조정을 조기에 완료하는 것이었다.

회사의 분위기는 썰렁하다 못해 살벌하기조차 했다. 출근하면 할 일을 챙기기보다 사표를 내느냐 마느냐에 더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오늘은 누가 사표를 썼고 누가 그 자리에 들어갔느냐가 관심사였다. 사표 받기를 주도하는 사장 주위에 있는 고위직은 며칠마다 승진하고 퇴직하는 일이 벌어졌다. 누가 토사구팽의 대상이 될 것이냐가 웃지 못할 희극으로 회자되었다. 그것은 직원들을 마음 들뜨게 하는 암담한 소식이었다.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렇게 서서히 직원들의 마음도 물 위에 떠도는 기름같이 회사와 분리되고 있었다.

회사는 경치 좋은 시골 풍경처럼 조경이 아름다웠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산야같이 수목이 우거진 숲속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출근길을 가볍게 해주곤 했었다. 어느 날부터 바람도 바뀌어 싸늘하게 가슴을 파고들어 메마르게 했다. 비라도 오는 날에는 음습한 바람 소리가 마음을 우중충하게 했다.

항해 중인 배가 폭풍우를 만났으니 정원 초과의 배에서 누군가는 내려야 온전히 운행할 수 있지 않으냐고 떠들어 댔다. 동료들 간에도 보이지 않는 눈치 싸움이 벌어졌다. 가슴이 베이는 듯 아팠다.

집에 와서도 온통 회사 생각뿐이었다. 말수는 줄어들고 마음의 고통은 커졌다. 베란다에 나가는 횟수가 늘어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잿빛 하늘은 마음을 더 음울하게 했다. 큰아이가 대학에 막 들어갔고, 작은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생애에 돈이 제일 많이 소요되는 시기였다. 박봉에 늘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불만 한마디 쏟아내지 않은 아내의 눈치가 따가웠다. 회사 밖에서는 돈을 버는 방법도, 능력도 없었다. 모아놓은 돈도 없었다. 집에 오면 사표를 내서는 안 되고, 회사에 가면 사표를 내야 하는 이중성이 가슴을 후벼댔다. 이미 나간 동료들의 빈자리도 쓸쓸했다. 서서히 밀려오는 외로움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장은 드디어 구조조정을 마무리하기 위한 마지막 칼을 뽑아 들었다. 명예퇴직을 받는다는 공문이 떨어졌다. 사표 용지가 무슨 후한 인심처럼 여기저기 나돌아다녔다. 이미 결심한 친구들은 사표 용지를 용감한 전사의 표징인 양 의기양양하게 들고 다녔지만 미소 뒤에 보이는 애잔함이 가슴을 쓰리게 했다. 결심을 못 한 친구들은 망설임으로 애태우며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사표 쓸 시간은 사나흘 정도 주어졌다.

그때 어디에서 용기가 솟구쳤을까. 느닷없이 반발력이 솟구쳤다. 바람에 누웠던 풀이 일어나듯이 삐죽이 고개를 들었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2의 인생을 살아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안위했다. 결심하니 등을 무겁게 짓누르던 짐이 스르르 미끄러져 나가는 듯했다. 어쩌면 부화뇌동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니 그것은 갑작스러운 에너지의 방출로 인하여 지축을 흔들어대는 지진처럼 내 마음의 오작동이었을지도 몰랐다. 사표에 동참하는 게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표를 냈다.

회사를 나와 조그만 일을 시작해 이럭저럭 이끌어가고 있었다. IMF의 후폭풍이었을까, 방송에서는 늘 경기가 안 좋다고 했다. 방송에서 이야기하는 경기가 안 좋다는 것은 나라 경제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것은 나라 경제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가 하던 일도 시나브로 무논 마르듯 말라 갔다. 어렵사리 버텨보았지만 끝내 문을 닫아야 했다.

따뜻한 날씨는 개나리의 꽃을 유혹한 위장이었을까. 날씨가 춥지 않을 때는 그저 생각 없이 꽃을 바라보곤 했는데 날씨가 추워지니 꽃을 피운 개나리에 연민을 느낀다. 조금 기다렸다가 제철인 봄에 피었으면 좋았으련만. 하지만 저 꽃도 모호한 날씨 속에 꽃을 피울까 말까를 결정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갈등도 겪었으리라. 그냥 쉽게 꽃을 피우지는 않았을 테다. 바깥 날씨를 제대로 탐색하지 못하고 내린 결정이 아니었을까.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내가 내린 마지막 결정, 그것은 바로 객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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