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원
자유공원은 인천에 있는 공원이다. 이 공원은 조선조 말에 외국인에 의해 설계되어 세워진 근대공원이다. 인천에 있는 외국인들을 위한 공원으로 조성하였고, 그 이름도 만국공원이었다. 내가 이 공원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즈음 공원 이름이 자유공원으로 바뀌었다. 나는 시골에 살다가 인천으로 이사를 했는데 내가 다닌 초등학교가 공원 너머에 있었다. 공원은 유원지이기도 하면서 교통의 요지였다. 많은 길이 공원을 통하게 되어 있어 통행하는 사람이 많았고 차도 많았다. 그래서 공원에 놀러 오는 사람보다 그곳을 통과해 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인천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이 자유공원을 넘어 다니며 인연을 이어갔다.
그래서 내 젊은 시절의 기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그곳은 내 청춘의 고향이라 할만하다. 그 시절을 생각할 때면 동심으로 돌아간 듯 가슴이 설렌다. 동심의 계절도 아니고 지나간 청춘 시절을 가슴에 담는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 나이를 먹어 외롭다는 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지금 내 가슴에는 인천의 자유공원 옛 정경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내가 어렸을 적 공원은 아주 단순했다. 학교 운동장보다 작은 마당 같은 곳에는 동글동글한 자갈을 깔아 놓았다. 한쪽 끝에는 월미도 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다. 월미도는 공원에 서서 바라보면 손이 닿을 만큼 가깝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유명한 월미도는 출입이 통제되었기에 숲이 울창했다. 공원의 바로 아래로는 도크의 인천항이 보인다. 인천은 수심이 얕아 큰 배가 직접 들어올 수 없다. 그래서 갑문식 도크를 만들어 배가 항구에 접안할 수 있도록 했다.
중학교 가는 길은 공원과는 방향이 달라서 공원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2학년이 다 될 즈음에 이사했는데 그곳은 공원을 넘어 다녀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다시 공원과 인연을 맺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태권도를 시작했는데 태권도장이 또 공원 너머에 있었기에 공원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군에 갈 때까지 운동했기에 인연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어진 셈이다.
그러구러 공원의 벤치에 앉아 사색도 하고, 친구들과 즐기며 바다를 완상(玩賞)하는 나이가 되었다. 조성된 공원은 지대가 높아 한쪽으로는 인천 시내의 야경이 내려다보이고, 반대쪽으로는 바로 바다였다. 입항을 기다리는 외항선들의 불빛은 항구를 둘러싼 듯 아름다운 야경을 자아냈다. 그리고 갯내음 실은 바닷바람이 코끝에 스치면 그것은 항구 도시에서나 느낄 수 있는 이색적 향기였다.
길가의 가로수는 키가 큰 노거수의 아까시나무가 많았다. 아마도 나무의 크기로 보아 아까시나무 전래 초기에 심은 나무가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봄에 풍기는 꽃의 향기가 공원 전체를 덮었는데 그때 맡았던 꽃의 향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의 풋사랑 이야기도 이곳에 있다. 첫사랑이나, 짝사랑이 아니라 풋사랑이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다. 여중생이 하나도 없는 동네에 나타난 그녀는 우리의 희망이요, 선녀요, 공주였다. 우리는 누구 하나 그녀를 독차지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 또래 공동의 연인이 되었다. 그녀가 나타나면 옆으로 스쳐 가며 괴성을 지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손으로 툭 치고 도망가기도 했다. 애정 표현과 장난을 구분 못 하는 나이였다. 세월이 흐르며 풋사랑을 익히지 못하고 친구들은 하나둘씩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나도 이사를 하였고 그녀도 그렇게 잊혔다. 그러다가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다시 이사했는데, 그녀의 집과 바로 이웃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중학생 때하고는 달라졌다. 말 붙이기가 쑥스러워 모른 체하며 지냈다. 그녀도 나를 보고 모른 체 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얼굴도 마주치지 못하며 가슴만 두근거렸다.
촉촉이 내리던 봄비가 멎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나는 춘정에 겨워 밖으로 나와 서성거렸고, 그녀는 때마침 집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것은 우연일 수도 있고 필연일 수도 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런데 내 말은 혀가 꼬여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것은 중학생 때 장난치던 이후 처음으로 건네 본 말이었다. 가슴을 콩닥거리며 그녀의 답변을 기다렸다.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할 겨를도 없는 순간이었다. 그녀도 기다렸다는 듯 달갑게 받아주었다. 첫 데이트가 성사되었다. 우리는 시내로 나와 생맥주를 한 잔씩 하고 공원길을 걸었다. 마침 아까시나무꽃이 향기를 듬뿍 뿜어내고 있는 계절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생각나는 게 없다. 그냥 가슴만 두근거리며 묵언 수행하듯 걸었지 싶다.
그 후 나는 군에 입대했고, 군 생활을 반쯤 했을 때 휴가를 와보니 그녀가 살던 집은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그 후 지금껏 한 번도 본적 없이 자유공원과 함께 내 마음에만 남아있다. 차츰 고향에 가는 일도 뜸해지고 공원에 가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모든 과거가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지금, 내 가슴 속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그 작은 공원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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