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생선비늘*/3부 구멍담

방언유희(方言遊戱)

취송(翠松) 2022. 3. 19. 09:34

방언유희(方言遊戱)

방언의 사전적 의미는 표준어와는 다른, 어떤 지역이나 지방에서만 쓰이는 특유한 언어이다. 그렇다고 하여 표준어와 방언이 우열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은 지역마다 고유의 방언을 찾아 재미있는 이야기로 승화시키는 작업도 한다. 나에게도 방언으로 인한 추억이 있다.

방언 때문에 생긴 어긋난 소통은 군대에서 먼저 경험했다. 그때는 중대 교육이어서 전 중대원이 다 모인 장소였다. 교육을 주관하는 소대장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소대장이 어느 분대장을 특정하여 큰 소리로 불렀다. 소대장의 심기를 간파한 분대장은 ~’하고 잽싸게 대답하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 소대장한테 야라니, 하며 엉뚱한 트집으로 소대장은 화풀이하듯 분대장을 윽박지르며 발로 걷어차기도 하며 야단법석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얻어터지며 어찌할 바 몰라 쩔쩔매는 분대장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우리는 낄낄거리며 배꼽을 잡아야 했다. 물론 그 상황은 길지 않게 끝났다. 지루한 군 생활에서 잠시 웃음을 선사해준 촌극이었다. 그때 그 분대장이 라고 대답한 것은, 그의 고향에서는 통상으로 쓰던 방언이었지 반말이 아니었다.

내가 대구로 이사 와서 살기 시작한 때는 70년대 중반이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수도권과 지방의 교류가 많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말을 하면 대구 사람 아니네요, 하는 인사말이 돌아왔다.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은 없다. 요즈음 대도시에는 여러 지역 사람들이 많이 섞여 살기에 언어도 그만큼 다 섞였기 때문이리라. 대구에서도 정구지라는 말보다 부추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요즈음에 내 입에서도 부추라는 말 대신 정구지란 단어가 먼저 튀어나올 때도 있다. 그렇게 방언은 표준말과 혼용되며 바뀌어 가고 있다. 국수를 국시라 하고, 밀가루를 밀가리라 하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로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지금도 회자하고 있는 단어들이다. 처음 대구에 왔을 때 방언으로 인해 있었던 일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 되어 내 뇌리에 새겨져 있다.

입사한 지 한 달 정도 된 어느 날,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는데 입사 동기 한 사람이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쌀 팔러 간다고 했다. 쌀 팔러 가는 사람이 어찌 빈손으로 가는지 의아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보내준 쌀이 많은가보다 생각했다. 하릴없이 동네를 더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조금 전의 그 친구가 옆구리에 누런 봉투를 끼고 다시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쌀이었다. 그는 쌀 팔러 간 게 아니고 쌀을 사러 갔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어떤 연유에서 쌀 사러 가는 것을 쌀 팔러 간다는 말로 굳어졌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처음 이사 와서는 회사 근처에서 하숙하다가 월세를 얻어 자취했다. 그러다 매달 돈 나가는 게 아까워 전세로 방을 옮기기로 했다. 친구와 함께 방을 보러 다니는데 전세가 없었다. 대학교가 있는 동네이기에 세를 놓는 집이 많았다. 그런데 대문에는 달세도지라는 단어만이 붙어 있었다. 전세 놓는 집이 하나도 없는 게 이상했다. 들어가서 전세는 안 놓느냐고 물으면 전부 다 전세는 없다고 말했다. 당분간 이사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월세로 얼마간을 살았다. 그 후 한참을 지나서 직장에서 동료들과 집 이야기를 하다가 도지와 전세는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인은 전세라는 말을 몰랐고, 우리는 도지라는 말을 몰랐다. 도지(賭地)의 사전적 의미는 조선 말기, 한 해 동안에 돈이나 곡식을 얼마씩 내고 남에게 빌려서 쓰는 논밭이나 집터를 이르던 말이라고 되어있다. 도지는 방언이 아니었다.

회사에는 여직원들이 많았다. 전국 팔도에서 다 모였지만 지역적으로 아무래도 경상도 아가씨들이 많았다. 함께 근무하니 서로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총각들은 여직원에게 데이트 신청도 했다. 데이트하면서 사랑이 싹터 사내 결혼하는 이도 많았다. 남녀 간에 재미있는 단어 하나 존재했다. 그 단어는 언지 예.’였다. 총각 직원이 여직원에게 한번 만나자고 데이트 신청을 하면 여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언지 예하고 대답한다. 아가씨의 말투는 상냥하고 예쁘다. 그러면 남자는 언제라는 말로 알아듣고 성사됨에 신이 나서 몇 날 몇 시에 만나자고 말한다. 그런데 아가씨의 입에선 다시 언지 예라는 말이 나온다. 언지 예는 재미있는 단어로 우리 사이에 회자되었다. 아가씨의 언지 예아니오,’ 라는 부정의 의미였다. 하지만 남자들에겐 언제라는 시제로 들렸다. 그 말의 뜻을 안 후에도 언지언제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금도 데이트하는 청춘들이 언지 예를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방언은 다른 단어의 사용만은 아니다. 우리 어머니는 평안북도가 고향으로 말의 억양이 아주 거셌다. 아내는 강한 경상도 억양이다. 어머니와 아내가 만나는 때는 추석이나 설 명절, 그리고 무슨 집안의 행사가 있을 때뿐이었다, 그러니 서로 대화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어떤 때 어머니가 아내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키면 아내는 대답만 하고 말아버린다. 내가 왜 실행을 않느냐고 아내에게 물으면 아내는 어머니가 한 말의 뜻을 모르고 있었다. 억양이 서로 다르니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중매체의 발달, 교통의 발달, 인적 자원의 활발한 교류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에 들어간 지금은 방언으로 인한 소통의 왜곡이 일어나는 일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요사이는 엉뚱하게도 신세대들의 신조어 생성으로 세대 간의 불통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나이 든 사람들은 반복하기조차 힘든 아니 흉내를 낼 수도 없는 세대 간의 방언을 쏟아내고 있다. 처음 대구에 와서 맛보았던 소통의 왜곡은 오히려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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