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일생길
왕건 8길 중 마지막 길은 구사일생길이다. 초례봉에서 동곡지까지 약 4㎞의 하산 길이다.
초례봉의 명칭은 몇 가지 전설을 지니고 있다. 나무꾼이 초례봉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선녀를 만나 초례를 올리고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설, 왕건이 시량이에서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전열을 재정비해 초례봉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설, 또 호족이 왕건을 알아보고 자기 딸을 아내로 바쳐 초례를 치르게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또 이곳에서 초례를 치르면 반드시 아들을 낳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가팔환초길이 올라가는 길이라면 구사일생길은 내려가는 길이다. 견훤에게 패퇴한 왕건이 겨우 목숨 부지하여 도망간 길이 맞을까. 그렇다면 지금껏 걷느라 힘들어 다리가 휘청거리는 내 발걸음보다 더 힘든 발걸음이 아니었겠나. 이렇게 높은 산으로 도주로를 택했을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또 개활지보다는 험한 산길이 숨어서 도주하기가 더 용이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내려가면서 왕건이 파군재에서 견훤에게 대패한 뒤 신숭겸의 위왕대사(爲王代死)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져 도피한 길을 더듬어본다.
견훤의 공격을 받은 신라의 경애왕은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왕건은 친히 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공산에서 되돌아오는 견훤군과 접전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견훤에게 오히려 역습당하여 고려군은 거의 궤멸당하여 파군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지명도 파군재다. 파군재는 지금 불로동과 지묘, 동화사로 가는 삼거리이다.
왕건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신숭겸이 왕건으로 위장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니 지묘한 전략이라 하여 이곳을 지묘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군은 겨우 몇십 명만 구사일생 살아남아 도주 길에 올랐다.
파군재에서 북동쪽의 고개를 넘으면 동화사와 와촌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갈림길에 있는 동네가 현재의 백안이다. 후백제군이 왕건을 잡으라고 외치는 소리에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는 전설이 담긴 동네다. 지금은 백번 편안하다는 뜻이 담긴 백안(百安)으로 바뀐 것은 후세에 지역 주민이 겁먹은 흰 얼굴보다는 편안한 동네라는 좋은 뜻의 이름으로 바꾸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불로동은 파군재 남쪽에 있으며, 금호강 동쪽에 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노인이 없다는 뜻이다. 왕건이 지나갈 때 늙은이는 없고, 젊은 사람들만 있었다는 전설이다. 하지만 왕이 타는 수레도 없이 걸어가고 있다는 뜻으로 왕으로서의 위상을 잃었기 때문에 생긴 말일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불로의 로자는 임금 수레 로(輅)자였으나, 쓰이지 않는 용어이므로, 현대식 이름으로 고칠 때에 노인 노(老)자로 바꾸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해안은 도동의 동쪽, 방촌동의 북쪽이면서 초례봉의 서쪽에 있는 동네이다. 공산전투에 패배한 왕건이 급히 퇴진하여 이곳에 도착하면서 안전을 느껴 긴장이 풀리면서 얼굴이 펴졌을 거라는 설과 해안이라는 이름과 상황이 일치되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시랑리는 실왕리가 변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왕건은 평광동 뒷산에서 나무꾼을 만났다. 거기서 나무꾼에게 주먹밥을 얻어먹고 도망 길을 계속했다. 나무꾼이 나무를 다하고 내려와 보니 사람이 사라졌다. 뒤에 마을 사람들이 그가 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곳을 왕을 잃은 곳이라는 뜻의 실왕리(失王里)로 불렀다고 한다. 또 하나는 왕이 권위를 잃고 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실왕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조선 시대 말엽에 수치스러운 지명이라 하여 시량리로 고쳐 부르고 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왕건의 도주 길이라 생각하니 내려가는 길이 더 조심스럽다. 얼마나 힘든 길이었을까. 우리처럼 이렇게 바위에 걸터앉아 지친 몸을 달랠 여유나 있었을까.
영원할 것 같던 바위가 부서지며 미끄럽게 모랫길을 만들었다. 단단한 바위가 이렇듯 풍화되어 부서지는 것을 보니 미시의 세월을 살다가는 우리네 삶이 참 짧다고 생각해본다. 조금 내려가니 소나무 숲이다. 그 시절에 이 자리를 지키던 소나무의 후예들이 지금도 자라고 있을까. 소나무 숲을 지나니 내려가는 길은 더 넓어지고 평탄해진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조그마한 과수원에서는 여러 가지 과수가 저마다의 아름다운 색깔로 익어가고 있다.
한 무리의 검은 대나무가 보인다. 오죽(烏竹)이다. 강릉 오죽헌에만 있는 줄 알았던 오죽을 초례봉에서 만나다니 반가움이 배가된다. 슬쩍 어떤 비밀스러운 것을 본 듯 설렌다.
산길을 다 내려왔다. 동곡지가 보인다. 주위 경치의 반영(反影)이 아름다운 못이다. 이 못은 해방 전 착공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해방 후 누차 시공하여 1961년 준공하였다고 한다. 못을 한 바퀴 돌아 구경하는 것으로 초례봉 등산은 끝이 났다. 마지막 길의 다른 이름 구사일생길과는 달리 내려오는 길은 평화로웠다.
산 아래에 넓게 펼쳐진 뜰은 안심이다. 안심이란 지명은 목숨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을 견디며 도주하던 왕건이 이제 안심하였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안심 뜰은 지금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며 대구 혁신도시로서 날로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