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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꿈

달팽이의 꿈 / 박금선(박금아)(2020 제10회 천강문학상 대상) 지루한 장마였다. 홈통을 타고 내려오는 물소리에 밀려 오랜만에 베란다 청소를 했다. 화분을 밀어내고 물을 부으려고 할 때였다. 황갈색 왼돌이 달팽이 한 마리가 흙 부스러기 위를 한가로이 기어가고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물은 양동이를 떠나 해일처럼 돌진했다. 조난당한 배처럼 파도에 갇힌 신세가 된 달팽이를 건져 모종판에 놓아주었다. 비 오는 날이면 마당으로 나오던 달팽이를 잡아 담장 너머로 내던져 버리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버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정을 내렸다. '그래. 너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갈 때까지 기다려주마. 그만으로도 인연인가. 오며 가며 지켜보게 되었다. 녀석은 낮 동안에는 껍질 속에서 꼼짝않고 있다가 저물녘이면 빠끔..

청에 젖다

청에 젖다// 안 희옥(제9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소리를 따라 새떼가 날아오른다. 천변의 갈대들은 중모리로 춤을 추고 만추의 은행잎이 꽃비처럼 흩날린다. 허공으로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소리가 강물처럼 유장하다. 강이 바라보이는 정자에서 대금연주가 한창이다. 가랑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소리에 취해 하나 둘 모여 든 사람들로 여남은 평 되는 마루가 빼곡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애절한 소리에 듣는 이들의 가슴도 함께 저릿해진다. 무(無)의 공간을 꽉 채운 팔색조 같은 소리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한이 서려 있다. 대금에는 바람을 불어넣는 취구와 음정을 나타내는 여섯 개의 지공이 있다. 취구와 첫 번째 지공 사이에 난 구멍을 청공이라 한다. 이곳에 떨림판 역할을 하는 청을 붙이는데, 갈대 속의 얇은 막을 ..

냇내, 그리움을 품다

냇내, 그리움을 품다// 허 정 진 냄새는 그리움이다. 문득 아니면 울컥, 그때 그 어느 날의 흔적과 시간을 찾아 영혼의 빗장을 푸는 알레고리이다. 갓 볶아낸 커피 향기, 담장너머 청국장 냄새, 새로 갈아입은 옷에서 나는 새물내, 그 목도리에서 그 사람의 언어와 체온과 숨결이 느껴지는 체취, 꽃그늘을 지나다 흠칫 돌아보는 향수 내음. 가슴이 먹먹한 날, 무심코 잊고 살아왔던 먼 기억들이 일상을 툭 치고 갑자기 밀려오는 그리운 냄새들이 있다. 인간은 아주 다양한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 커피나 꽃들이 가진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눈을 감고도 그 사람의 땀과 체취만으로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다. 후각수용체 신경은 특정 냄새에 대해 한 가지 세포만 존재하기 때문에 수많은 냄새에 대한 정밀한 뇌 지도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