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수필모음 82

바위 아래 개 두 마리

바위 아래 개 두 마리 / 존 버거 토니오는 내 가장 오랜 친구 중 하나다. 우리는 거의 반세기 동안 서로 알고 지냈다. 지난 해 함께 건초를 옮긴 어느 더운 날, 목이 말라 음료수와 커피를 마시면서 그에게서 들은 얘기다. 이제 내가 아는 한, 소물이꾼 안토닌은 딱 두 번 눈물을 흘린 셈이 된다. 결혼은 했지만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은 드물었다. 그렇게 보면 소몰이꾼의 삶은 군인과 비슷하다.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안토닌은 내게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다. 다음은 토니오가 들려준 얘기다. 토니오는 마드리드 북쪽 엘 레켄코 계곡에서 안토닌을 처음 만났다. 안토닌은 거기서 소를 치고 있었다. 전에 그 둘은 전혀 몰랐던 사이였다. 이 지방의 상세 지도를 펴 보면 계곡의 남쪽 사면으로 ..

바늘꽃

바늘꽃 / 배정수(스틸에세이 1회 은상 수상작) 저녁부터 조물닥 조물닥 꽃을 피운다. 바늘귀에 주홍빛 실을 꿰어 장미 세 송이를 활짝 피우고, 옆에는 라벤더를 곁들인다. 개망초와 노란 씀바귀에는 빨강 열매를 수놓고, 줄기마다 짙고 옅은 초록 잎을 달아준다. 코스모스와 구절초를 무리지어 놓았더니 가을이 문을 열고 나온다. 바늘 지나간 자리가 곱다. 고마운 이에게 손수 만든 자수 브로치를 선물하고 싶었다. 봄을 닮은 그녀에겐 수수하고 잔잔한 팬지와 씀바귀를, 여름의 열정이 느껴지는 매사에 열심인 그녀에겐 화려한 장미와 라벤더를, 가을의 분위기를 간직한 차분하고 온화한 친구에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와 구절초를, 겨울의 냉철함으로 늘 많은 조언을 해 주시는 선배에게는 동백꽃을 수놓으며 작은 브로치 안에 사계절을 ..

쇠, 매화를 피우다

쇠, 매화를 피우다/ 박순조(스틸에세이 1회 금상 수상작) 반백년이 넘었다. 볼록한 배는 군데군데 상처가 있어도 늘 웃는 얼굴로 나를 지켜준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몸, 가늘면서도 약간 꼬부라진 입, 선비의 깃같이 생긴 머리까지 마치 새끼 백로가 물가 자갈밭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는 모습처럼 언제 보아도 우아하고 사랑스럽다. 그뿐이랴. 매실 모양으로 생긴 장석은 손잡이를 꽉 쥐고 있어 여간해서는 빠지지 않아 만든 사람의 뚝심과 지혜로움이 돋보인다. 가장 특이한 점은 배 가운데와 머리에 새겨진 매화는 사시사철 화르락 피어 향기를 뿜는다. 이 보물이 내게 온 것은 오십여 년 전 눈이 발목까지 차던 설 단대목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 살림을 쥐락펴락하던 오빠 내외는 한 입이라도 줄이기 위해 나와 엄..

고로(高爐)

고로高爐 /류 현 서(스틸에세이 1회 대상 수상작) 제철공장의 고로 하나가 사라진다. 반세기 가까이 견디며 보수를 거듭해오다가 생명이 한계에 다다랐나 보다. 세월 앞에는 사람도 노쇠老衰 하고 쇠도 산화된다. 고로도 사람의 육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고로는 잡다한 쇠붙이들을 열로 보듬는다. 보기 좋은 것도 흉한 것도 품어 안고 융화시켜 준다. 고로를 거쳐 나온 쇳물은 사물로 다시 태어난다. 고로는 쇠붙이의 자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뜨거운 쇳물을 끌어안는 동안 쇠붙이로 된 몸도 서서히 닳고 삭아진다. 나의 고로는 토함산 자락의 마을에서 시작됐다. 산은 그렇게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는, 질펀한 능선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차츰 준엄한 형상을 드러냈다. 길고 짧은 골들은 청옥색 하늘을 이고 신묘한 입체화를..

달팽이

달팽이//손광성 달팽이를 보고 있으면 걱정이 앞선다. 험한 세상 어찌 살까싶어서이다. 개미의 억센 턱도 없고 벌의 무서운 독침도 없다. 그렇다고 메뚜기나 방아깨비처럼 힘센 다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집이라도 한 칸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시늉만 해도 바스라질 것 같은 투명한 껍데기, 속까지 비치는 실핏줄이 소녀의 목처럼 애처롭다. 달팽이는 뼈도 없다. 뼈가 없으니 힘이 없고 힘이 없으니 아무에게도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물며 무슨 고집이 있으며 무슨 주장 같은 것이 있으랴. 그대로 `무골호인`이다. 여리디 여린 살 대신에 굳게 쥔 주먹을 기대해 보지만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그렇다고 감정마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민감하기로는 미모사보다 더하다. 사소한..

겨울 갈대밭에서

겨울 갈대밭에서/ 손광성 슬퍼하지 말자. 날카롭던 서슬 다 갈리고. 퍼렇던 젊은 핏줄 모두 잘리고, 눈, 코, 입.귀, 감각이란 감각들 다 닫혀 버리고, 바람에 펄럭이는 남루를 걸친 채 섰을 지라도, 슬퍼하지 말자 찬물에 발목이 저린 이들이 우리들뿐이겠는가. 물방개 같은 것들. 잠자리며 철새 같은 것들, 친구들. 다정했던 이웃들, 그들이 칭얼거리다 간 빈자리에. 아무것도 줄 수 없었던 내 무능의 뜨락에. 바람 말고는 이제 다시 찾아오는 이 없다 해도. 허기와 외로움도 때로는 담담한 여백일 수 있는것. 다 내 주어서 편안한 가슴들아, 갈대들아. 마른 허리 꺾고, 야윈 어깨 더 많이 꺾고, 이제 두레박 들어올려 물마실 기력마저 부친다 해도 슬퍼하지 말자. 강바람에 서로 몸을 한데 묶어 부축하고 버티면 버티는..

우물

우물 / 최장순 누가 말을 거는 것일까. 우, 우, 나를 깊숙이 들어왔다가 돌아나가는 소리. 가만 귀 기울이면 내 안에 우물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빛의 반사나 굴절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듯 기분에 따라 수심이 달라지는 그 우물은 생명의 고향인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두레박줄처럼 나를 탯줄로 잇고, 세상에 내보내고도 아직은 바닥이 깊지 않은 나를 조바심으로 지켜봤다. 얕은 동네 우물은 비와 바람과 눈을 고스란히 받아냈지만 맑은 날이면 하늘은 물론 주변까지 품었다. 곁의 호두나무는 제 그늘을 드리워주었고, 안부처럼 잎을 띄워놓기도했다. 속을 다 내준 그 우물은 누구든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른 아침 낫을 갈고,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농기구를 씻으며 ..

샘 / 정병율 가끔씩 나는 샘물에 풍덩 빠지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어떤 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살면서 괜히 우울해지거나, 가슴이 막막해질 때 혹은, 화가 머리 꼭두까지 치솟았을 때 그런 마음이 한 번씩 들곤했던 것이다. 설핏 그런 생각이 든다. 샘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들어가면 우선 내 마음이 안정될 것이라는 것!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기에 철저한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도 있다. 그러기에 무한한 상상과 새로운 꿈을 펼칠 수도 있으리라. 특히 여름철에는 그 샘물에 첨벙 몸을 담그면 얼마나 시원할까 싶기도 하다. 그처럼 맑고 청아한 샘은 이 도시 주변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지금은 아주 깊은 산골에서나 볼 수 있는 그것은 어느새 우리에..

물소리를 들으며

물소리를 들으며 / 허창옥 혼자 앉아서 물소리를 듣는다. 그 시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물은 눈앞에서 두세 번 꺾이며 떨어져서 소(沼)에 잠긴다. 영국사 가는 길, 숨이 찰 즈음에 삼단폭포를 만났다. 폭포는 높지 않고 물줄기도 새지 않다. 마찬가지로 소도 둘레가 크기 않고 깊이도 얕다. 작고 조용한 폭포, 오히려 쉬기에 편안한 느낌이다. 평상처럼 편편한 바윗돌에 홀로 앉아있다. 이제 막 돋아나는 새잎들의 투명한 초록으로 천지가 눈부시다. 물은 연신 떨어져서 포말로 퍼지고 소는 그물을 받아 안는다. 물은 소에 이르나 한 쪽이 터져있어 또 어디론가 흘러내린다. 그러니 소는 더함도 덜함도 없이 마냥 그대로이다. 품었으나 다시 흘려보내니 소는 편안해 보인다. 소는 그 속을 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물이끼 낀..

무심천의 피라미

무심천의 피라미 / 목성균 청주시 한 복판을 가르며 흐르는 냇물을 무심천(無心川)이라고 한다. 마음을 비워 주는 냇물이라는 선입견을 주는 이름이다. 청주를 양반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걸 명예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취적이지 못한 도시라는 말 같이 들려서다. 양반, 고루한 보수성향의 비생산적인 사람을 가르키는 말로 들리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무심천이란 냇물의 뉘앙스가 그런 소리를 듣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무심천, 왠지 소리치며 흐르는 냇물이 아니고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알 수 없는, 시체(時體) 말로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우유부단한 사람을 이르는 이름 같아서 맘에 안 든다. 아무튼 좋다. 무심천(無心川)이든 유심천(有心川)이든 냇물 이름이 문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