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수필모음/마바사아 24

봄, 수목원을 읽다

봄, 수목원을 읽다//윤 승 원(2011 3회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봄, 수목원은 만연체다. 온갖 나무와 풀들이 저마다 화려한 문장을 쓰느라 술렁거린다. 노랗고 빨갛고 흰 색깔들이 나의 독서를 유혹한다. 나는 청명의 안개 속을 걸어 만화방창 꽃의 문장 속으로 들어간다. 병아리 깃털 같은 햇살이 민들레처럼 피어나는 낮 시간도 좋고, 청자 빛 하늘이 노을로 채색되는 저녁 무렵도 좋지만 나는 푸르스름한 이내가 깔린 여명의 수목원을 좋아한다. 제비꽃, 족두리풀, 목련, 명자꽃들이 새 명찰을 달고 제 이름을 불러달라는 듯 손을 흔들고 서있다. 문고판 같은 야생화며 전집류의 나무들이 수목원도서관에 가지런히 꽂혀 있다. 이 푸른 도서관의 사서는 잠시 출타중인 모양이다. 바람이 먼저 책을 읽으려는지 팔랑팔랑 책장..

머리카락

머리카락/정성희 거울 앞에서 빗질을 한다. 처음에는 대담하고 큰 동작으로, 그다음에는 작고 세밀한 손질로 머리를 빗는다. 유난히 숱이 많고 긴 탓인지 아무리 다듬어도 이내 헝클어지고 만다. 여러 번의 쓰다듬음 끝에 깔끔한 정도는 아니지만 남들 눈에 지저분하지 않을 만큼 가지런한 모습이 되어 간다. 참빗으로 골이 생기지 않게 촘촘히 쓸어내려진 머리카락이 피부에 닿는 것을 느끼며 얼굴 주위를 감싼다. 그 흑단의 물결 속에 두 눈을 담그면 검은 머리칼은 큰 파도가 되어 살아 있는 내 주위의 모든 의식을 움켜쥔다. 곱슬곱슬한 머리, 구불구불한 머리, 삐죽삐죽 세운 머리, 땋아 늘인 머리, 손바닥처럼 매끄러운 민머리… 출렁이는 바다 안에 그 길이와 올의 굵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모양이 만들어지는 컴컴한 심연 속..

舞/정성희(2010년 제2회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화창한 봄날이다. 한 무리의 사물놀이 패들이 소고와 장구를 두드리며 겨우내 잠든 대지를 깨우면서 봄의 정취를 재촉한다. 여기저기서 꽃불이 터지자, 봄물에 나들이 나온 구경꾼들이 주변으로 모여든다. 둥둥둥 북이 울리자, 꽹과리를 치며 흥에 취한 상쇠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온몸으로 신명을 몰아온다. 바람의 장단에 몸을 떠는 대나무처럼 주춤거리던 늙수그레한 노인네들의 소맷자락도 들썩이기 시작한다. 작대기 장단에 영춘가를 부르며 흠뻑 흥에 취한 나이 든 춤꾼들은 땟국에 전 그들의 인생만큼이나 후줄근하고 걸걸한 춤으로 무아지경에 이른다. 엎드려 숨죽이고 있던 내 본능도 겨울 문풍지처럼 들썩대며 몸을 보챈다. 그 칭얼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몸이 시키는 대..

부음(訃音)

부음(訃音) / 박시윤 - 제13회 중봉문학상 우수상 이 겨울, 문 안으로 들지 못한 것들은 한데서 얼었다. 차가운 것에 등을 돌릴 때, 급히 안으로 몸을 들이밀며 식어가던 시간을 추스르던 저녁. 나는 어떤 이들의 고통도 아무렇지 않게 잊었다. 잊었다, 잊었다. 잊어버릴 때까지 눈은 계속 내리고, 눈 쌓인 들은 평온한 잠 속에서 침묵했다. 먼 산자락, 아주 먼 마을에서 부고가 전해졌다. 늦가을까지만 해도 숨을 헐떡이며 올해는 넘길 수 있을 거라 안도하던 그가 올해를 넘기지 못했다. 꽉 채운 일흔 하나, 환갑·진갑 넘겼으니 살 만큼 살았다고 스스로 위로하던 그였다. 일구던 텃밭에 푸성귀 파릇파릇 돋고, 나비 훠얼 훨 날고, 어린 손주들 앵두나무에 매달려 왁자하게 웃을 때, 봄날의 나른한 잠은 유난히도 깊었..

바위 아래 개 두 마리

바위 아래 개 두 마리 / 존 버거 토니오는 내 가장 오랜 친구 중 하나다. 우리는 거의 반세기 동안 서로 알고 지냈다. 지난 해 함께 건초를 옮긴 어느 더운 날, 목이 말라 음료수와 커피를 마시면서 그에게서 들은 얘기다. 이제 내가 아는 한, 소물이꾼 안토닌은 딱 두 번 눈물을 흘린 셈이 된다. 결혼은 했지만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은 드물었다. 그렇게 보면 소몰이꾼의 삶은 군인과 비슷하다.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안토닌은 내게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다. 다음은 토니오가 들려준 얘기다. 토니오는 마드리드 북쪽 엘 레켄코 계곡에서 안토닌을 처음 만났다. 안토닌은 거기서 소를 치고 있었다. 전에 그 둘은 전혀 몰랐던 사이였다. 이 지방의 상세 지도를 펴 보면 계곡의 남쪽 사면으로 ..

바늘꽃

바늘꽃 / 배정수(스틸에세이 1회 은상 수상작) 저녁부터 조물닥 조물닥 꽃을 피운다. 바늘귀에 주홍빛 실을 꿰어 장미 세 송이를 활짝 피우고, 옆에는 라벤더를 곁들인다. 개망초와 노란 씀바귀에는 빨강 열매를 수놓고, 줄기마다 짙고 옅은 초록 잎을 달아준다. 코스모스와 구절초를 무리지어 놓았더니 가을이 문을 열고 나온다. 바늘 지나간 자리가 곱다. 고마운 이에게 손수 만든 자수 브로치를 선물하고 싶었다. 봄을 닮은 그녀에겐 수수하고 잔잔한 팬지와 씀바귀를, 여름의 열정이 느껴지는 매사에 열심인 그녀에겐 화려한 장미와 라벤더를, 가을의 분위기를 간직한 차분하고 온화한 친구에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와 구절초를, 겨울의 냉철함으로 늘 많은 조언을 해 주시는 선배에게는 동백꽃을 수놓으며 작은 브로치 안에 사계절을 ..

쇠, 매화를 피우다

쇠, 매화를 피우다/ 박순조(스틸에세이 1회 금상 수상작) 반백년이 넘었다. 볼록한 배는 군데군데 상처가 있어도 늘 웃는 얼굴로 나를 지켜준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몸, 가늘면서도 약간 꼬부라진 입, 선비의 깃같이 생긴 머리까지 마치 새끼 백로가 물가 자갈밭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는 모습처럼 언제 보아도 우아하고 사랑스럽다. 그뿐이랴. 매실 모양으로 생긴 장석은 손잡이를 꽉 쥐고 있어 여간해서는 빠지지 않아 만든 사람의 뚝심과 지혜로움이 돋보인다. 가장 특이한 점은 배 가운데와 머리에 새겨진 매화는 사시사철 화르락 피어 향기를 뿜는다. 이 보물이 내게 온 것은 오십여 년 전 눈이 발목까지 차던 설 단대목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 살림을 쥐락펴락하던 오빠 내외는 한 입이라도 줄이기 위해 나와 엄..

우물

우물 / 최장순 누가 말을 거는 것일까. 우, 우, 나를 깊숙이 들어왔다가 돌아나가는 소리. 가만 귀 기울이면 내 안에 우물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빛의 반사나 굴절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듯 기분에 따라 수심이 달라지는 그 우물은 생명의 고향인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두레박줄처럼 나를 탯줄로 잇고, 세상에 내보내고도 아직은 바닥이 깊지 않은 나를 조바심으로 지켜봤다. 얕은 동네 우물은 비와 바람과 눈을 고스란히 받아냈지만 맑은 날이면 하늘은 물론 주변까지 품었다. 곁의 호두나무는 제 그늘을 드리워주었고, 안부처럼 잎을 띄워놓기도했다. 속을 다 내준 그 우물은 누구든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른 아침 낫을 갈고,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농기구를 씻으며 ..

샘 / 정병율 가끔씩 나는 샘물에 풍덩 빠지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어떤 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살면서 괜히 우울해지거나, 가슴이 막막해질 때 혹은, 화가 머리 꼭두까지 치솟았을 때 그런 마음이 한 번씩 들곤했던 것이다. 설핏 그런 생각이 든다. 샘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들어가면 우선 내 마음이 안정될 것이라는 것!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기에 철저한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도 있다. 그러기에 무한한 상상과 새로운 꿈을 펼칠 수도 있으리라. 특히 여름철에는 그 샘물에 첨벙 몸을 담그면 얼마나 시원할까 싶기도 하다. 그처럼 맑고 청아한 샘은 이 도시 주변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지금은 아주 깊은 산골에서나 볼 수 있는 그것은 어느새 우리에..

물소리를 들으며

물소리를 들으며 / 허창옥 혼자 앉아서 물소리를 듣는다. 그 시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물은 눈앞에서 두세 번 꺾이며 떨어져서 소(沼)에 잠긴다. 영국사 가는 길, 숨이 찰 즈음에 삼단폭포를 만났다. 폭포는 높지 않고 물줄기도 새지 않다. 마찬가지로 소도 둘레가 크기 않고 깊이도 얕다. 작고 조용한 폭포, 오히려 쉬기에 편안한 느낌이다. 평상처럼 편편한 바윗돌에 홀로 앉아있다. 이제 막 돋아나는 새잎들의 투명한 초록으로 천지가 눈부시다. 물은 연신 떨어져서 포말로 퍼지고 소는 그물을 받아 안는다. 물은 소에 이르나 한 쪽이 터져있어 또 어디론가 흘러내린다. 그러니 소는 더함도 덜함도 없이 마냥 그대로이다. 품었으나 다시 흘려보내니 소는 편안해 보인다. 소는 그 속을 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물이끼 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