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생선비늘*/1부 생선비늘

생선 비늘

취송(翠松) 2022. 3. 2. 19:28

생선 비늘

현관을 들어서는 아내의 치마에 이물질이 반짝인다. 다가가 떼어내니 생선 비늘이다. 나는 언뜻 버리지 못하고 장난감인 듯 만지작거린다. 아내는 그런 나를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하지만 숙연해지는 내 마음을 어찌 알까. 내 가슴속엔 좀체 떨어지지 않는 생선비늘 하나 있다.

우리 가족은 한국전쟁 때 피난 내려왔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에서의 삶은 마른 풀조차 없는 황야에 서성이는 초식동물의 삶이었다. 우리에게 재산이라곤 새 둥지의 새끼들처럼 입들만 벙긋거리는 자식들만이 전부였다. 암수가 번갈아 먹이를 나르는 어미 새같이 어머니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어머니는 생선 장사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새벽 4시에 울리는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 소리에 맞추어 여명도 없는 어둑새벽에 선창으로 나가곤 했다. 어머니의 일은 휴일도 없는 출근이었다. 저녁에 몸이 아프다고 끙끙 앓던 날도 아침에 일어나보면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장성하여 청년이 되었을 때, 얼마 동안 어머니를 도우려 선창에 나갔었다. 어머니가 새벽에 혼자 걷던 길을 함께 걸었다. 그 길은 시내 복판의 길이 아니라, 시 외곽의 외진 길이었다. 가로등도 없어 어둡고 칙칙했다. 오른쪽으론 기찻길이 지나고 왼쪽으론 커다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창고들만이 우중충하게 서 있는 그런 길이었다. 오가는 사람 하나도 없는 길은 괴기스러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그때야 비로소 어머니가 걷고 있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길인가를 생각했다.

새벽의 선창은 시끌벅적 불야성이었다. 배는 일렬횡대로 서로 의지한 채 출렁이고 있었다. 배에 올라가야 했다. 출렁이는 배에 오르기 위해선 배에 걸쳐진 좁다란 널빤지를 타고 건너야 했다. 출렁이는 널빤지를 건너 배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 선창에서 일한 경륜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조심조심 건너야 하는 널빤지를 어머니는 가볍게 발을 움직여 리듬을 타며 잘도 건넜다. 배에 오르자 갑판에선 알아듣지 못할 어부들의 악다구니가 싸움하는 듯 요란스러웠다. 거대한 바위에 부딪혀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뱃사람들의 말투는 거칠고 강했다. 어머니의 말투가 투박한 게 이북 사투리여서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내가 선창에서 하는 일은 생선을 지키는 일이었다. 경매가 시작되기 전까지 생선을 경매장에 옮겨야 했다. 서로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자리다툼 하는 게 싸움터였다. 이런 분주한 틈을 노려 생선을 훔쳐 가려는 자들은 마치 사자의 먹이도 낚아채 가는 하이에나같이 여기저기서 시커먼 눈들을 번득거렸다. 바다로 헤엄쳐서 올라오는 자들은 흡사 해적 같았다. 눈 깜빡할 사이 생선 상자가 없어질 때도 있었다. 아프리카 정글 같은 곳에서 거친 사내들과 생선을 거래하는 것이 어머니의 직업이었다.

어선에서 내린 생선들은 경매장에 들어가야 하지만, 들어가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값싼 잡어들이 그렇고, 고급생선이라도 경매장에 들어갈 수 있는 양이 안 되는 것들도 그렇다. 어머니는 그런 것들을 받아 파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거래되는 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어떤 날은 생선이 담긴 무거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길거리 판매를 해야 했다.

팔다 남은 생선을 집에 가져올 때도 있었다. 언젠가는 고급생선인 값 비싼 민어를 가져왔다. 싱싱하여 얼마든지 팔 수 있는 물건이라는 걸 자식들도 다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비싼 생선을 가지고 왔다. 못 팔아서가 아니라 자식들 먹이려고 남겨온 것이었다. 자식새끼에게 한 번쯤 맛있는 생선을 먹이고 싶었던 어머니의 마음을 어찌 모르랴.

민엇국은 하얗게 백숙으로 했다. 어떤 맛도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민어 맛이 좋았다. 기름이 동동 떠다니는 민엇국, 그런 날은 밥도 하얀 쌀밥으로 했다. 어느 명절, 어느 생일보다 맛있게 먹는 날이었다. 그럴 때 나는 어리석게도 생선 장사 하는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했다. 내 몸엔 지금도 고급 생선인 민어의 맛이 녹아 있다. 그때 민어만 먹은 게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먹은 탓이다.

어머니가 선창에 나간 건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한 삶의 몸부림이었다. 아버지도 뱃사람이었기에 선창이 일터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노동만으로는 우리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없었다. 어머니가 생선 장사를 했기에 겨울을 넘길 쌀가마니가 골방에 쌓이고, 연탄 광에는 연탄이 들어찼다. 겨울 내기 김장김치가 땅속에서 익어갈 때 우리 식구들도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앞치마엔 늘 생선 비늘이 붙어 다녔다. 그것은 떼어버려야 할 고달픈 삶의 흔적이었다. 어머니의 생선 장사는 내가 다 큰 후에도 계속되었다. 나는 그 길이 그냥 자식들을 위해서 걸어야 하는 어머니의 운명 같은 길이라고만 생각했다. 어머니가 힘에 부쳐 장사를 그만두실 때까지, 한번도 선창에 그만 나가시라고 말하지 못했다. 나는 질기게 붙어 다니는 어머니 앞치마의 비늘을 끝내 떼어내 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상흔처럼 내 가슴 한 모퉁이에서 아리다. 생선 비늘은 지금도 나의 사모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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