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그때 나는 마음 수련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햇살 좋은 봄이 되면 건강을 챙기기 위해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기 마련인데 지난겨울이 너무 추웠던 탓일까, 줄어든 회원 숫자가 회복되지 않고 썰렁한 분위기가 오래갔다.
수련장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마음도 일그러졌다. 바르고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갑게 회원들의 비위도 맞추고 흥미를 잃지 않도록 잘 다독여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수련생의 소소한 실수에도 편치 않은 속내를 드러내 버리곤 했다. 수련을 끝낸 회원이 자기 앞에 놓여있는 전열기를 끄지 않았다고 눈살을 찌푸렸다. 속에서 끓고 있는 불쾌한 감정을 정제하지 못하고 얼굴에 표출하는 일이 많았다. 봄이 되어도 녹지 않는 응달 속의 얼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수련장에는 볼품없는 화분이 몇 개 있었다. 그들은 추운 겨울을 냉방에서 견디어내야 했다. 심장같이 생긴 잎을 주렁주렁 매달고 줄기를 척 늘어뜨린 스킨답서스가 겨울을 어렵사리 넘기는가 했더니 기어이 얼어 죽고 말았다. 몇몇 화초들은 추위를 이기느라 무지 애를 쓰며 간신히 버텨냈다. 그런 와중에 군자란이 꽃망울이 옹기종기한 꽃대를 올리고 있었다. 이까짓 추위가 뭐 별거냐는 듯 씩씩하게 자라는 모습이 동계훈련하는 특수부대원들같이 용감해 보였다. 군자란이 분홍색의 꽃을 피우면 수련장의 분위기도 부드러워질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화분에 영양제 한번 꽂아주지 않았는데도 봄마다 꽃을 피워내는 군자란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어렸을 적에도 봄 같지 않은 봄을 맞은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입학금 납부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은 고등학생이 되는 꿈에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모든 건 순리대로 되지 않았다. 입학금 납부기한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해거름에 그림자 드리우듯, 어둠이 내 몸을 감싸는 듯싶었다. 마음에 음습한 기운이 스며들며 불안과 초조함이 가슴을 뛰게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지워버리려 하면 할수록 수업료를 제때 못내 집으로 되돌아오던 재학시절의 생각이 가시가 되어 머리를 찔러댔다. 그래도 달빛 같은 가느다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은, 그때는 지독한 가난에서 시나브로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상을 걷은 후, 어머니가 내 곁으로 슬며시 다가오셨다. 불길한 예감이 소용돌이치듯 방안을 휘감았다. 분명 이것은 정상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머니도 긴장된 듯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내 얼굴에서도 핏기가 빠져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 한 해 쉬었다가 내년에 가면 안 되겠느냐.” 어머니는 더듬거리며 말씀하셨다. 머리가 하얘지며 숨이 멎은 듯해서 멍하니 어머니 얼굴만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몇 마디 더했지만, 귓등을 맴돌아 나갈 뿐이었다.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절망감만이 가슴을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다음 날,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여느 날과 똑같이 새벽에 돈 벌러 나가셨다. 나는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다. 혹시나 마음 바뀐 어머니가 일찍 들어오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온종일 대문 앞만 서성거렸다. 시간은 난로 옆에서 녹아내리는 눈사람같이 흘러갔다. 내 생각을 한마디도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창공을 날듯이 넘어간 태양이 서산마루 나뭇가지에 걸렸을 때 나는 어머니가 들어올지 모른다는 공상을 했다. 가슴은 사금파리에 찔린 듯 아팠고, 두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끝내 어머니는 어두워져서야 들어오셨다.
매일 꿈을 꾸었다. 낯모르는 사람이 입학금을 내줄 때도 있었고, 담임선생님이 내줄 때도 있었다. 좋아서 팔짝팔짝 뛰다가 깰 때는 너무도 허전해서 눈물이 났다. 어떤 때는 책가방도 새로 사고 교복도 맞추어 입었다. 머리맡에 책가방을 챙겨놓고 잠자리에 드는 꿈도 꾸었다. 학교 가서 아이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기분은 하늘을 날랐다. 아침에 눈을 뜨니 해가 중천이었다. 학교 늦는다고 손을 더듬거려 가방을 찾기도 했다. 가방도, 교복도, 모자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서서히 꿈결은 사라지고 현실이 화면처럼 펼쳐졌다. 이런 날이 꽤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친구들의 부류도 바뀌었다. 나는 빈둥거리며 노는 아이들과 어울려야 했다. 빈둥거린다는 것은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다른 표현이었다. 누구와 어울려 다녀도, 밤늦게 들어와도, 며칠씩 들어오지 않아도 누구 하나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식구는 식구들대로 내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무한의 자유였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이 묶인 듯 아픈 자유였다. 그해 봄은 꽃이 자랄 흙조차 없는 암담한 봄이었다.
나는 진학하지 못한 것을 마치 천지개벽이라도 한 듯 절망했었다. 하지만 일 년을 기다려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었다.
참담한 시절이 전부이고 끝날 것 같지 않아도 흐르는 세월 속에 삶은 늘 바뀐다. 내년 봄엔 가슴 활짝 열고 따뜻하게 봄을 맞아보자. 그리고 희망을 그려보자. 봄이 와도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식물이 자랄 흙이 필요하듯, 내 가슴에도 흙 한 삽 채워보자. 그래, 춘래불사춘이 아닌 희망의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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