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
늦가을 바람이 스산하다. 길가의 플라타너스 마른 잎이 사각거린다. 코끼리 귀 같은 넓은 잎으로 훠이 훠이 무덥던 여름 더위를 쫓던 잎이었다. 어느덧 풍성하던 잎 하나둘 떨어뜨리며 다가올 매서운 계절에 몸 움츠리고 있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본다. 나뭇가지에는 머리숱이 빠져 듬성듬성한 내 머릿결처럼 얼마 남지 않은 나뭇잎들이 애처롭다. 그래도 고택의 기둥 같은 마들가리가 중후하고 듬직하다. 그런데 매끄럽게 뻗은 아랫부분과 달리 마들가리 윗부분이 이상하다. 깨끗이 낫지 않은 상처처럼 여기저기 울퉁불퉁한 곳이 눈에 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가지 잘린 부분의 그루터기다.
플라타너스는 남에게 상처를 내보이고 싶지 않은가보다. 가지 잘린 상처를 진액을 내어 감싸 안는다. 어떤 곳은 표피로 완전히 감싸 안았고 어떤 곳은 아직도 감싸 안는 중이다. 울퉁불퉁한 상흔도 세월이 가면 흔적 없이 지워지려나. 어쩌면 그것은 아픔조차 가슴으로 녹여내는 구도자 같은 삶으로 얻은 깨우침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곤한 삶을 이겨내느라 참고 견디며 살아온 조개가 만들어낸 진주처럼. 플라타너스가 감춘 상흔을 바라보노라면 이제 할머니가 된 큰누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큰누나의 삶은 꼬불꼬불 구절양장의 길이었으며, 바위너설이 삐죽삐죽한 산길을 걷는 고행의 길이었다. 우리는 한국전쟁 중에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었다. 피난 중에 우리 가족이 정착한 곳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그만 섬이었다. 내 삶의 기억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집 앞으로는 하얀 모래밭이 펼쳐지고, 썰물이면 온갖 조개가 숨어있는 개펄이 우리를 불러내고는 했다. 뒤로는 봄이면 연분홍의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는 야트막한 산이 동네를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하지만 생존의 문제가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니, 아무리 아름다운 정경도 마음에 들어 올 리 없었다. 볼록볼록 초가지붕들이 수북이 쌓인 볏가리가 아닐진대 찰가난의 생존 속에서는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더 시급한 문제였다.
누나는 일찍 시집을 가야 했다. 밥벌이하는 식구를 하나라도 늘리기 위해 데릴사위를 맞아들이듯 매형을 우리 식구로 만들려는 방편이었다. 매형은 혈혈단신으로 피난 나온 사고무친이었다. 그러니 누나와 연을 맺으면 우리 식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배를 타는 매형은 건장한 체구로서 듬직하기까지 해서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다.
한국전쟁 직후의 삶은 살벌했다. 토박이인 동네 유지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유지라는 사람은 결혼하여 아들까지 있는 매형을 수상하다고 군부대에 신고했고, 군부대에 끌려간 매형은 성하지 않은 몸이 되어 풀려났다. 매형은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어이없게 매형을 잃은 누나는 아들 하나 딸린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삶의 터전이 없는 피난민이 정착하기에는 섬은 좁았다. 섬 생활로는 살아갈 수가 없어 우리 가족은 도시로 거처를 옮겼다. 한꺼번에 다 갔으면 좋겠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되어 몇 번을 나누어 이사했다. 나중에는 누나와 나 그리고 조카만 남았다. 누나와의 생활은 더 힘들어졌다. 도시에서 제때 식량을 보내주지 않을 땐 굶어야 했다. 이웃집에서 쌀을 꾸어다가 죽을 쑤어 먹기도 했고, 밀기울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누나와 내가 함께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살다가 누나와 나도 도시의 식구들과 합류했다.
도시라지만 여전히 살아가기가 팍팍했다. 설움 많은 피난살이에서 벗어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누나는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돈을 받는 게 아니라 밥 식구 하나 덜기 위해 집에서 내보낸 것이다. 누나는 이따금 집에 잠깐 들렸는데 옷소매 접은 곳에서 꼬깃꼬깃한 지전 한 잎을 꺼내 나에게 주고는 했다. 눈깔사탕 두 개를 사 먹을 수 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소중한 돈이었다. 나도 꼬깃꼬깃 접어서 주머니 깊숙이 넣고 다녔다.
청상이 무슨 죄인가, 누나는 인천 부두에서 다섯 시간이나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강화 벽지로 유배당하듯 다시 시집을 갔다. 새 매형도 이북에서 홀로 피난 나온 외로운 사람이었다. 시골 동네의 조그만 정미소에서 일하고 있던 매형의 돈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매형의 수입만으로는 아이들 공부를 시킬 수 없는 형편이어서 누나도 발 벗고 나서야 했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나는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을 하면 시골의 누나 집에 놀러 갔다. 누나는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이라도 온 것 모양 좋아했다. 중학생인 동생이 자랑스러운 듯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것은 누나에게도 찾아올 가족이 있다는 것을 온 누리에 알리려는 몸부림 같았다. 그때 누나의 가슴 속에 들어 있는 절절한 외로움을 보았다. 친정 식구들과 얼굴 한번 볼 수 없는 외진 곳에 떨어져 사는 누나의 외로움이 큰 파도가 되어 내 가슴에 울렁거렸다.
누나는 딸만 넷이다. 지금 누나에게 딸만 넷인 이유도 가슴 아린 사연이다. 첫아들은 장성하여 결혼할 나이가 될 때쯤 몹쓸 병을 얻었다. 누나의 갖은 정성에도 소생하지 못하고 끝내 누나의 가슴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런 큰 상처를 가슴에 안은 누나가 어찌 아프지 않겠나. 그래도 누나는 늘 의연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누나 집에 갔을 때도, 내가 커서 누나 집에 갔을 때도, 누나는 근심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누나는 언제나 즐거운 듯 웃는 얼굴이었다.
나는 지금도 고향에 가면 누나 집을 들르고는 한다. 누나는 지금도 변함없이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누나는 어려운 삶에서 깨우침이라도 얻은 것일까. 누나의 가슴엔 사리라도 들어 있는 것일까. 아픔을 마음으로 삭이는 누나는, 가지 잘린 상처를 제 몸으로 감싸는 플라타너스를 빼닮았다. 이 가을에 뭉근한 정 같은 것이 느껴지는 플라타너스를 보니 내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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