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도시락
추억은 아픔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나 보다.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어린 시절에 사용하던 노란 알루미늄 도시락으로 음식을 파는 식당을 소개하는 중이다. 식당은 문전성시다. 고객들은 추억을 먹으러 오는 것이라고 말하며 즐거운 듯 웃는다. 어떤 이는 도시락 대신 물 한 모금 마시며 점심을 대신했었다고 멋쩍은 웃음을 날리기도 한다. 가난한 시절을 살아왔던 나에게 노란 도시락의 추억은 슬픈 낭만으로 간직되어 있다.
작은 도시락에도 빈부가 있었다. 부잣집 아이들의 밥은 쌀밥이요, 가난한 집 아이들의 밥은 보리밥이거나 잡곡밥이었다. 부잣집 아이들의 반찬은 콩자반이나 멸치볶음이거나 노란 단무지였다. 가난한 집 아이들의 반찬은 대개가 김치였다. 국물 질질 흘러 밥의 반쯤은 김칫국물로 적셔있다. 그리고 몇몇 아이들은 고추장을 반찬으로 싸 와서는 밥에 섞어 도시락을 힘차게 흔들어 고추장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주눅 들거나 소심하게 숨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가난은 시대적 아픔이었으니까.
도시락 추억의 백미는 아무래도 겨울에 난로 위에 밥을 데우던 정경이 아니랴. 셋째 시간이 끝나면 아이들은 도시락을 난로 위에 얹기 시작했다. 난로 위에 수북이 쌓아 올린 도시락에서 나오는 밥 누는 냄새와 김치 익어가는 냄새는 짙은 향기처럼 달콤했다. 공부하기 싫은 아이는 도시락 당번을 자청했다. 밑에 있는 도시락과 위에 있는 도시락을 교대 시켜 주는 일이다. 자칫하면 제일 밑에 있는 도시락은 누룽지가 되다 못해 타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이었다. 공부를 시작하여 두 번째 시간이 끝나면 여기저기서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이 있다. 아침 늦잠을 자느라고 밥을 먹지 못하고 온 아이들도 있고 한참 식성이 좋을 때니 이미 배가 고파 먹는 아이들도 있고, 남들 먹으니 그냥 따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도시락을 꺼내놓고 급하게 몇 젓가락씩 먹고 뚜껑을 덮는다. 곧 셋째 시간 선생님이 들어온다. 학생들은 급하게 손등으로 입을 닦고 시치미 뚝 떼고 공부할 준비를 한다. 선생님은 들어오자마자 코를 킁킁거리며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밥 먹은 놈들 전부 앞으로 나와.’ 느닷없는 불호령에 아이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해하는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대개는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데 꼭 지적하고 가야 식성이 풀리는 선생님들도 있다. 약간의 실랑이로 공부 시간 몇 분이 흘러가니 아이들에겐 그것 또한 놀이다. 학교에서 도시락 검사를 할 때도 있었다. 쌀이 부족하여 정부에서 혼식을 장려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는 시 외곽에 있어 버스 통학을 했다. 밀폐된 버스 안에서는 김치 냄새가 진동했다. 도시락 반찬을 김치를 갖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다, 반찬통이 도시락 안에 있으니 어찌 김칫국물이 흐르지 않으랴. 마침 커피가 대중화되어 커피를 담는 유리병이 김치 통으로 등장했다. 병이 크니 김치도 충분히 가지고 다닐 수 있어 마른반찬을 가지고 다니던 부잣집 아이들도 김치를 들고 다녔고, 버스에서는 아침마다 김치 냄새를 맡아야 했다.
도시락의 추억은 소풍에도 있다. 소풍 갈 때 가방에 먹을 것을 싸서 오는 아이도 있지만, 대개는 노란 도시락 하나를 달랑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녔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도시락을 허리춤에 달고 다니면 움직임이 편했다. 걸을 때마다 반찬통과 젓가락이 딸가닥거려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고등학교 상급생이 되었을 때 소풍의 노란 도시락은 일회용 나무 도시락으로 바뀌었다. 동네 시장에 가면 나무 도시락을 팔았는데 값도 아주 저렴했다. 나무 도시락에 밥을 싸거나, 김밥 한두 줄 넣어 가서 먹고 도시락은 그냥 쓰레기로 버리면 되었다.
이렇듯 도시락의 추억도 있지만, 도시락을 못 가지고 다닐 때의 아픈 과거가 더 가슴 시리게 한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하교 시간이 늦어져 도시락을 싸서 다녀야 했다. 점심시간이 시작되면 마치 하루 중 가장 반가운 시간이 된 것처럼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딸가닥 소리를 내며 도시락을 펼쳤다. 그럴 때면 나는 슬그머니 문을 열고 교실을 빠져나가야 했다. 나에게는 도시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풀이 죽어 밖을 서성이는 아이들에게도 희망이 생겼다. 미국에서 원조해주는 옥수숫가루로 죽을 쑤어 먹이는 무료 급식이 시작된 것이다. 책가방에는 도시락 대신에 알루미늄 양재기 하나와 숟가락 하나만 넣고 다니면 됐다. 옥수숫가루 죽이라도 계속 먹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오 학년에 올라가면서 무료급식은 중단되고 말았다.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선생님이 결식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몇몇 아이들이 모여 앉아 도시락 뚜껑에 밥을 한 숟가락씩 덜어내어 밥 한 그릇을 만들었다. 하얀 쌀밥에 콩자반, 멸치볶음, 노란 단무지 같은 아주 맛있게 보이는 반찬들이 군침을 돌게 했다. 우리에게 먹으라 했다. 꽤 오랫동안 나와 결식 아이들은 십시일반 도와주는 급우들의 도움으로 결식을 면했다. 그렇게 선생님은 결식아동을 위해 아이들을 설득했고 아이들은 쉽게 따라주었다. 우리 학교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많았다. 도시락을 나누어주는 아이들도 가정형편이 아주 좋은 아이들은 아니었다. 며칠에 한 번씩이었지만 친구들의 사랑과 온정을 먹었다. 지금 친구들의 얼굴은 하나도 떠올려지지 않지만, 그 따뜻한 추억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식당에 앉아 과거를 새기며 담소하는 사람들을 보니 나의 뇌리에 새겨진 도시락의 추억이 더듬어진다. 먹을거리가 풍족해서 병들게 하는 요즘 세상에 가난했던 시절의 되새김이 생뚱맞다. 노란 도시락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풍경을 보다니 격세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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