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생선비늘* 47

내 삶의 퍼펙트

내 삶의 퍼펙트 퍼펙트(perfect)란 말을 처음 들은 건 젊었을 때 볼링장에서였다. 한 게임을 스트라이크로 시작해서 스트라이크로 마감하여 300점 만점을 받는 것이다. 언젠가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여자 양궁선수가 과녁의 정중앙을 맞히어 중계방송용 카메라 렌즈를 깨뜨렸다. 그때 중계석에서는 퍼펙트 골드를 외쳤다. 퍼펙트는 그렇듯 완벽함에만 있는 것일까. 나는 한때 주차관리 일을 했었다. 내 나이 이미 노년에 이르렀지만 100세 시대에 대처하기 위해 조금 더 일이 필요했다. 주차관리 일은 책상에 앉아 사무 보는 일이 아니요, 기계를 돌려 생산을 하는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팔고 돈을 받는 일도 아니다. 차를 잠시 보관해주고 그 대가를 받는 서비스업이다. 또한, 주차장 일은 젊은이들이 양..

겨울나무에 날아든 새

겨울나무에 날아든 새 주차장 부스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큼직한 노거수 한 그루가 서 있다. 태양이 높이 솟아오르자 겨울 햇살이 나뭇가지에 내려앉는다. 볕 좋은 겨울나무에 새들이 날아든다. 잎 떨어져 앙상한 겨울나무에 날아든 새들의 종알거림으로 나무가 흥청거린다. 나는 멍하니 잎조차 떨어져 아무것도 없는 겨울나무를 찾은 새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하루가 심심해서 놀러 나온 걸까. 아니면 집에 배곯는 새끼가 있어 먹이를 구하러 나온 것일까. 새들의 일터는 나무가 아니라 나무 밑 아스팔트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새들의 눈에는 보이기라도 하나 보다. 차디찬 아스팔트를 맨발로 종종거리며 바닥을 쪼아댄다. 단단한 바닥을 쉴 새 없이 쪼아대는 연약한 부리가 애처로워 마음이 쓰인다. 이놈들도 나처럼..

막노동

막노동 나는 공기업에서 근무하다가 명예퇴직을 했다. 그렇다고 퇴직금으로 노후대책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설마 할 일이 없겠나 싶었지만 정말로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기 수련원을 개원했다. 내가 건강관리 차원에서 수련하던 것을 이제 지도자급이 되었기에 수련원을 개원할 자격이 주어졌다. 적성에 맞는 일을 직업으로 하니 돈도 벌고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큰 수입은 아니더라도 즐기며 그럭저럭 십여 년을 운영해왔다. 노력이 부족했던지 경기가 좋지 않아서인지 활짝 펴보지 못하고 끝내 수련원도 불경기의 늪에 빠졌다. 시나브로 무논 마르듯 말라가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손을 털어야 했다. 어느새 나이가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도 수입이 있어야 하기에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떤 일이라도 해야 ..

노동조합 설립 참가기

노동조합 설립 참가기 2월 중순 이른 아침의 동대구역 맞이방이다. 아직은 얕은 추위가 겨드랑이 속으로 파고드는 쌀쌀한 날씨였다. 모인 인원은 모두 여섯 명이다. 칠백여 명이 되는 직원에 비하면 적은 인원이지만 약속한 인원은 다 참석했다. 매일 보던 얼굴이건만 이들의 건조한 대화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떤 이는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다가 열차표를 들여다보기도 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이따금 문 쪽을 바라다보며 힐끗거리기도 했다. 비장감마저 감도는 얼굴을 보면 무슨 비밀 결사라도 하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드디어 개찰이 시작되었다. 지금껏 아무 일 없었음에 다행이다 싶은 마음으로 도망치듯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나도 이들과 함께 대전 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지난 연말에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매호천의 봄

매호천의 봄 배산임수라 했던가. 매호천은 우리 동네가 품고 있는 젖줄 같은 하천이다. 이 하천은 내가 처음 이곳에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살아있는 하천이었다. 비라도 한바탕 내린 후에는 피라미, 붕어, 미꾸라지 같은 물고기들이 꼬리를 흔들며 놀았다. 물고기를 본 아이들은 신기한 무엇이라도 본 듯 즐거워했다. 동네는 점점 커졌고 고층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도시의 발전은 역기능도 있다. 새로운 건물들이 샘솟는 물줄기를 막아버렸는가 보다. 어느새 비가 와야만 물이 흐르는 사막의 와디처럼 건천이 되어버렸다. 물이 흐르지 않는 하천은 낡은 건물을 보는 듯 삭막했다. 무너져 내리는 강둑엔 잡초마저도 견딜 수 없었다. 그랬던 하천이 탈바꿈했다. 몇 년 전에 정부의 ‘고향의 강’ 사업에 선..

동아줄

동아줄 동서가 등산하러 가자고 이끌었다. 겨울의 끝자락인데 눈 덮인 산을 한 번이라도 밟아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냉랭한 우리 집 분위기를 반전시켜주려는 속 깊은 배려임을 어찌 모르랴. 나는 다니던 회사를 명예퇴직하고 다른 일을 시작했다. 직업은 내가 좋아서 하는 취미가 아니고 돈을 벌어야 하는 생존이 걸린 문제이다. 그런데 나는 여유 있는 자의 소일거리같이 마음 수련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돈이 안 되는 일을 즐기듯이 말이다. 나를 보고 한심한 사람이라고 한숨지을 아내를 생각하면서도,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고 고집스레 붙들고 있었다. 가뭄에 무논 마르듯 가정이 서서히 메마르기 시작했다. 가정을 묶어주던 화목도 서서히 풀어져 가고 있었다. 아내는 인내에 한계를 느낀..

가족

가족 세상이 왜 이럴까. 요즈음 뉴스에는 부모가 자식을 죽였다는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젊은 엄마가 자기 아이를, 이모가 조카를 죽였다. 외할머니가 제가 난 아이를 딸이 난 아이와 바꿔치기하고 끝내는 그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짐승이 제가 낳은 새끼가 사람의 손을 타면 제 새끼를 죽인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어찌 인간이 제 새끼를 죽인단 말인가. 남자들이 평생 가도 군대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듯, 팔순의 큰 누나는 나만 만나면 피난길에 겪었던 일을 전설처럼 이야기하며 밤을 지새우곤 했다. 열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겪은 전쟁의 참화는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일이기에 가슴에 맺힌 아픔도 컸으리라. 나는 어렸기에 기억나는 순간이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누나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기에 그..

구멍 담

구멍 담 담장은 안과 밖을 가로막는 벽이다. 그렇지만 담장에는 소통을 위한 틈새도 있다. 언젠가 송소고택을 다녀온 적이 있다.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자리한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심처대(深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건축한 가옥이다. 우리 조상의 후덕한 인심처럼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위에 홍살까지 설치해 놓은 거대한 솟을대문이 낮은 담장과 대비되어 오히려 기이한 모양새다. 마치 입을 크게 벌려 상대를 제압하려는 하마의 입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새 나왔다. 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설주에 기대선 행랑채에서 허술한 옷차림의 행랑아범이 머리를 조아리며 손님이라도 맞으러 나올 듯했다. 행랑아범 대신 품이 넉넉한 시골 마당이 평화롭게 손님을 맞이했다. 99칸 저택의 규모가 이런 것이구..

객기(客氣)

객기(客氣) 날씨가 변덕이다. 입동이 지났는데도 그동안 따뜻한 가을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 한파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방송의 일기예보에서는 내일은 더 춥다고 하니 얼마나 움츠러들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아파트 담장엔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으니 말이다. 개나리가 따뜻한 날씨에 그만 잠시 계절을 착각했을까. 아니면 추위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란 자만감에 객기라도 부린 것일까. 몸 움츠리고 두런거리는 개나리가 애잔해 보인다. 십여 년 전, 그해의 마지막 달이었다. 회사는 구조조정의 회오리에 함몰되어 있었다. 회사를 통폐합하는 작업이기에 구조조정의 폭은 컸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노동조합은 통폐합 반대 투쟁으로 날을 샜다. 여기저기 붉은 깃발은 찢어진 채..

팔공산

팔공산 팔공산 능선 길을 걷는다. 높은 하늘은 청명하고 옷깃으로 스며드는 가을바람이 상쾌하다. 나는 등산을 할 때마다 산길이 인생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련한 기억 속의 일이다. 늘 다녀 익숙한 팔공산에서 길을 잃어 헤맨 적이 있었다. 회사 직원 몇이 어울려 파계재로 올라 능선 따라 동봉까지 가서 하산하기로 했다. 계절은 겨울의 초입이지만 산속의 감나무에는 알알이 매달린 홍시가 속살을 파고드는 서리를 견디어내며 가을을 붙들고 있었다. 북쪽의 나무들은 월동준비가 끝난 듯 잎 떠나보내고 조용한 침묵에 잠겼고, 남쪽의 나무들은 양지바른 곳에 앉아 노는 아이들처럼 속살거리고 있었다. 파계재부터 동봉까지는 완만하게 오르는 능선 길이다. 사방이 확 트인 능선 길의 시원함이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름다운 경치..